[시론/강경근]시민단체가 대법원장 뽑나

  • 입력 2005년 8월 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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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6년을 마치고 9월 23일 퇴임하는 최종영 대법원장의 후임자 지명을 앞두고 최근 몇몇 시민단체와 이익단체가 발표한 인선기준 중 하나가 좀 기발하다.

이들 단체의 논리는 이렇다.

전국 판사의 인사권과 보직권 등 법원행정권을 독점하는 대법원장이 버티고 있는 대법원이야말로 법원 문제의 발원지다. 사법부는 이 사법행정권을 독점한 제왕적 대법원장이 사법권력의 정점에 위치하고 그 밑에 관료화된 법관들이 도열해 온 수직적인 위계질서다. 그러므로 법관들은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대법관으로 대법원에 몸을 담은 인사는 대법원장과 함께 우리 사법사 왜곡의 공범이다. 그러니 참여정부의 첫 대법원장은 대법관으로 대법원에 발을 들인 적이 있는 인사는 배제돼야 한다. 따라서 새 대법원장은 재야 변호사 아니면 판사 경력은 있되 적어도 대법원에 몸담은 적은 없는 ‘신선한 인물’ 중에서 물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 이래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립 역사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비(非)법적인 ‘여론재판용’ 비판이다. 우선 대법원장은 제왕적일 수 없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며 대법관 임명권도 대통령에게 있다. 대법원장은 그 제청권만 가진다. 대법원장의 일반 법관 임명권도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제왕적이라 한다면 대통령은 그 위에 있는 상왕(上王)인가.

관료화된 법관들, 수직적인 위계질서, 법관들이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등등의 지적들 역시 헌법 조문의 행간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의 명령에 따르려고 노력해 온 일반 법관들의 명예를 심히 훼손하는 자의적인 지적이라 평가될 수 있는 대목이다.

참여연대가 선정한 대법원 개혁의 이유를 보여 준 판결 7가지를 보면, 노동자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판결, 삼성그룹 이재용 씨를 보호한 판결, 판결의 외피를 쓴 대법관들의 정치적 선언 등이라 하여 법리적인 접근성보다는 문제를 적과 동지라는 흑백논리에 더 쉽게 맡긴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이 우리 사법사 왜곡의 공범이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독일의 헌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글에서 정치의 속성을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에서 찾았다. 그러니 대법원장 인선 기준의 제시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닌지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대법원장을 뽑아 법원 개혁을 이루자는 국민여론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대법원장 권한의 본질은 역시 재판권에 있다. 그것이 사법권의 핵심이다. 법원 개혁은 헌법이 부여한 재판권을 독립한 법관이 그 양심에 따라서 재판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의 철저한 검증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대법원에 몸담은 적이 없으면 신선한 인물일 것이다’ 하면서, 대법관으로 대법원에 발을 들인 적이 있는 인사는 배제돼야 한다는 식의 자의적인 재단은 곤란하다.

사법부의 수장이 누가 되느냐는 국민적 관심사인 만큼 시민단체나 이익단체가 인선에 대해 나름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인선의 첫 번째 조건은 법조인으로서의 철학이나 전력이어야 한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시민사회단체는 일반 시민이 공감할 만한 일을 해야 한다. 이를 여론 권력화하여 오히려 헌법이 보장하는 사법의 독립을 훼손하게 된다면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사법은 이제 국민주권주의의 한계를 넘는 여론권력의 독선으로부터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험난한 도전 앞에 서 있다.

강경근 숭실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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