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實勢는 위험하다

  • 입력 2005년 4월 19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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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한 듯싶던 ‘실세’라는 단어가 요즘 다시 많이 등장한다.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투자 의혹과 관련해 이름이 오르내리는 대통령 주변 인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제는 이 사업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허문석 씨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몇 차례 만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허 씨는 정 장관과 만난 데 대해 “누구의 소개로 어디서 만났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는데, 소개해 준 사람이 실세 중 한 사람 아닐까.

현실 정치에서 실세는 분명히 존재한다. 제도 안에 있건, 밖에 있건 ‘정권 영향권’의 일에 나름대로 입김이 센 사람들이다. 대통령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독대(獨對) 횟수가 많을수록 실세라는 말도 있다.

지금으로선 이들 실세가 러시아 유전 개발 추진에 개입했거나 힘을 빌려줬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들의 주장대로 사기꾼들에게 이름을 도용(盜用) 당한 사건일 수도 있다. 수사를 넘겨받은 검찰은 권력형 비리인지, 아니면 실세들이 오히려 피해를 본 경우인지를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사건의 진실과 상관없이 실세라는 단어가 자주 나도는 세상은 피곤하다. 그 말에는 시스템 대신 음습하고 공작적인 냄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 공정한 경쟁의 실종 같은 것이 묻어 있다. 우리 정치사가 그랬다. 역대 정권마다 어김없이 실세라 불린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권세의 칼을 칼집에만 넣어 두는 참을성이 약했다.

현 정권에도 실세가 적지 않다. 주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나 대선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정부나 공기업 인사가 있을 때, 물 좋은 대형 사업이 시작될 때,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이들이 뒤에 있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근거 없는 얘기도 적지 않겠지만….

누구든 실세라는 견장을 달면 그것은 불행의 시작일 수 있다. 실세의 자리에는 그만큼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세인의 관심사가 되고, 권력을 좇는 불나방 같은 부류의 유혹 대상이 된다. 실세가 일단 부정과 비리에 빠지면 그 규모는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형인 경우가 많다. 적당히 숨기거나 덮고 지나갈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니 패가망신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권력 주변 사람들은 몸가짐이 엄격해야 한다. 누군가가 수상한 걸음으로 다가오면 세상에 공개하겠다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야 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은 아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실세(實勢)는 짧고 실세(失勢)는 길다는 것이 과거 정권들이 남긴 ‘살아있는 역사’다.

민간 조직이나 집단에서도 실세라는 말이 나돌면 위기 신호다. 실세가 설칠수록 조직 생산성과 구성원의 사기는 떨어진다. 잘나가는 조직, 건강한 집단에서는 실세가 활개 칠 공간이 적다.

실세라는 말이 사어(死語)가 되는 세상이 바람직하다.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말이 자주 나올 까닭이 없다. 진짜로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대통령 측근이 아니라 국민이 실세여야 한다. 모든 국민이 실세라면 굳이 실세라는 말은 필요 없고….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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