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박범진]개혁에 이중잣대는 안된다

  • 입력 2005년 2월 6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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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개혁은 다른 사람들, 다른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자신들은 예외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정치자금, 선거, 국회 입법 등 모든 분야에서 종종 나타난다. 그 결과 개혁을 표방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주요 참모들이 선거가 끝난 뒤 줄줄이 감옥엘 갔고 지난해 17대 국회의원 선거 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47명의 의원 중 62%인 29명이 열린우리당 소속이었다.

입법과 관련해서는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17대 국회에서 일어난 일이 좋은 예다. 지난해 정기국회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에게 증여세나 상속세를 소급 과세하지 못하도록 조세특례법은 고치면서 기업의 과거 분식회계를 증권집단 소송에서 2년간 유예해 주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 개정안은 부결시켜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인의 과거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지만 기업엔 과거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형평성을 잃는 입법이다.

▼정치인엔 관대, 경제인엔 엄격▼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에게 소급해서 증여세나 상속세를 과세하지 못하도록 법을 고친 것은 우리의 정치 현실로 볼 때 불가피한 일일 수 있다. 그동안 불법 정치자금을 주고받는 관행이 워낙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군부통치가 끝나고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뒤에도 불법 정치자금을 주고받는 관행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명분론만 앞세우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는 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명분론과 현실론의 대립이 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에게 소급 과세를 못하도록 한 것은 현실론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정치인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실론을 적용하면서 기업에는 명분론을 내세운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정치권이 정치자금과 관련해 어쩔 수 없는 과거가 있었다면 기업도 경제발전을 이끌어 오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 줘야 한다. 기업이 분식회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지금 다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권에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국회의 입법 활동이 형평성을 잃어선 안 된다. 명분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균형 있는 입법이 돼야 한다. 경제계의 불만이 커지자 정부와 여당은 이번 2월 임시국회에서 기업이 과거의 분식회계를 정리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가질 수 있도록 법 개정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한 입법 활동이 잘못됐음을 인정한 셈이다.

사실 정치권은 자신들의 정치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명분론과 현실론을 오락가락해 왔다.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명분론을 앞세우고 현실적으로 필요할 때는 여야가 야합하는 공생관계를 보여 줬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4년 3월 임시국회에서 국민 몰래 정치자금법을 고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주고받을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정치자금법에 처벌 조항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법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여야 비밀 합의로 처벌조항을 슬그머니 삭제했다. 그 당시 정치자금법 개정이 워낙 은밀하게 이뤄져 국회 출입기자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명분과 현실의 균형감각 요구▼

정치자금법에서 그 처벌 조항이 삭제된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97년 이른바 한보 사건이 터지고 나서다. 다수의 정치인이 한보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으나 처벌조항이 없어 거의 대부분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지탄을 받은 정치권은 그해 정기국회에서 다시 처벌조항을 살리는 법 개정을 해야 했다. 개혁세력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진정한 개혁세력은 개혁에 이중성을 보여서는 안 된다. 표리부동한 개혁으로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좀 더 진지하고 균형감각 있는 개혁세력이 돼야 한다.

박범진 건국대 초빙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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