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아름다운 뒷모습 남기고…원로시인 이형기씨 별세

  • 입력 2005년 2월 2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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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 ‘낙화(落花)’로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 이형기(李炯基) 씨가 2일 오전 10시 20분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193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문리대를 졸업한 뒤 동양통신 서울신문 대한일보 기자, 국제신문 편집국장, 동국대 교수,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16세 되던 1949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해 천재 시인으로 불렸으며, 이후 줄곧 시단의 중심적 위치를 지켜 왔다. 생전에 그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시의 덫에 걸렸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정치부 기자 생활도 오래 하고 편집국장까지 지내면서 정계 진출의 유혹도 많이 받았지만, 그 ‘덫’ 때문에 늘 그런 대열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게 되었다”고 털어놨다. 시인과 정치가 모두 현실개조의 의욕을 갖고 있지만 뜯어고친 현실도 또다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인의 삶은 정치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고인은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시집 ‘적막강산’ ‘심야의 일기예보’ ‘절벽’, 비평집 ‘감성의 논리’ ‘한국문학의 반생’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그의 시들은 ‘낙화’에서 보듯 아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을 특유의 반어법으로 표현해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사회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득도하지 않기 위해 구도하고, 구원에 이르러 안주하지 않기 위해 구원을 갈구한다”고 했던 고인은 “변하고 소멸하는 것을 인정하고 처절히 절망한 후에야 인간에게 본질적 자유가 주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11년 전 뇌중풍으로 쓰러진 뒤에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 구술 시작(詩作)을 했을 정도로 시혼(詩魂)을 불살랐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은숙 씨(68)와 딸 여경 씨, 사위 김태윤 씨(한국와이어스 대리)가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는 4일 오전 9시 서울 도봉구 방학동성당에서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02-929-4099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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