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세진/“누굴 믿고 신고하라는 겁니까”

  • 입력 2004년 8월 9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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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7시경 서울 강서구 방화동 H빌라 2층 복도 계단.

경관살해범 이학만씨(35)가 검거되면서 인질로 잡혀 있던 집주인 박모씨(49·여)가 5시간 만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위기를 벗어난 박씨의 얼굴에는 안도감보다 오히려 화가 난 표정이 역력했다.

박씨는 이웃 주민 수십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게 다가가 따졌다.

“열어 놓은 베란다 문으로 들어왔으면 쉽게 잡았을 텐데 왜 현관으로 와서 소동을 피웠느냐.”

박씨의 거센 항의에 경찰은 고개를 숙였다.

이웃 주민들도 맞장구를 쳤다.

“사이렌을 울리며 순찰차가 접근하는 바람에 앞집 뒷집 주민이 놀라 밖으로 나왔다.”

“경찰이 초인종을 누르면서 인질을 향해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고 반응이 없자 문을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박씨가 침착한 대처로 불상사를 당하지 않고, 살인범까지 검거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더욱 곱지 않은 시선으로 경찰을 보고 있다.

경찰의 ‘인질범 검거매뉴얼’에 따르면 경찰은 무엇보다 신속·은밀하게 현장에 출동하도록 돼 있다. 이후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설득조, 체포조 등을 차례로 구성해 인질 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경찰이 이날 보여준 대처는 이런 수칙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반드시 매뉴얼대로 처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허준영 서울지방경찰청장은 “틀에 박힌 상황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미흡한 게 왜 없겠느냐”고 출동 경찰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아무리 상황이 다르다 하더라도 사이렌을 울리며 접근했고, 또 현관문을 걷어차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인질을 배려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사건이 보도된 후 동아닷컴 등 인터넷사이트에는 ‘강도가 도망이라도 쳤으면 하는 경찰의 소망이 바로 사이렌소리 아닌가요?’ ‘앞으로 누가 경찰을 믿고 신고하겠느냐’는 등의 글이 쏟아지고 있다.

언제쯤에나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안심하고 경찰에 맡길 수 있게 될는지….

정세진 사회부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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