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창덕궁과 창경궁'…왕실의 '희로애락' 안식처

입력 2003-12-05 17:25수정 2009-10-1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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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 오른쪽은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이다. 가운데는 동궐도에 나타난 창덕궁 인정전 일대. 인정전 앞의 넓은 마당인 조정에는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줄을 서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사진제공 열화당
◇창덕궁과 창경궁/한영우 글 김대벽 사진/288쪽 4만원 열화당 효형출판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1598)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자 선조는 궁궐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법궁(法宮)인 경복궁은 제쳐 두고 창덕궁과 창경궁만 손을 보았다. 그 후 경희궁과 경문궁(덕수궁)을 새로 지으면서도 고종에 이르기까지 어느 왕도 경복궁을 중건하지는 않았다.

왜 조선 왕실은 경복궁 복구를 기피했던 것일까. 저자인 한영우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풍수적으로 명당(明堂)이 아니라는 소문이 왕실을 심리적으로 압박했고 △태조 말년에 일어난 ‘왕자의 난’의 비극이 후대 왕들을 괴롭혔으며 △궁궐이 북쪽의 북악산이나 서쪽 인왕산에 노출돼 멀리서 내려다볼 수 있어 왕비나 왕대비 등 여성들이 은밀하게 거처하는 공간으로 부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반해 창덕궁과 창경궁은 깊은 숲에 가려져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을 뿐더러 후원(後苑)이 넓고 아름다웠다. 경복궁이 궁궐로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왕실은 생활공간으로서 창덕궁과 창경궁을 좋아했다.

실제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10년 뒤에 건설됐지만 조선왕조 역사상 정궁(正宮)으로 가장 오래 이용됐다. 경복궁의 왕궁사는 250여년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태종 5년(1405)에 건립된 후 1926년 순종 서거 때까지 520여년 동안 궁궐의 기능을 수행했다. 조선왕조사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역사학의 현장성을 되살리기 위해 왕조가 있었던 현장, 궁궐의 역사를 처음으로 쓰면서 창덕궁을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창경궁은 창덕궁을 확장한 개념으로 당시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묶어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순조 28년(1828)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펼쳐들고 현장을 다니며 역사를 더듬어 건축물이 아닌 역사 무대로서의 궁궐사를 풀어냈다.

태종 자신도 이복동생 방석(芳碩)을 폐위시킨 뒤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골육상잔(骨肉相殘)의 현장인 경복궁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경복궁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나 여름에 피서를 위해 잠깐 다녀오는 정도로만 이용했고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다.

창경궁은 성종 15년(1484) 대비들을 위해 지은 궁궐이다. 앞서 덕종과 예종이 요절하고 성종마저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어린 임금 주변에는 대비들이 많았다.

창덕궁은 선조 40년(1607)에 시작된 중건 공사가 광해군 원년(1609)에 완료되자 법궁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창경궁은 정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는 창경궁 전체가 동향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임금은 남쪽을 향한 집에서 정사(政事)를 돌보는 것이 원칙이었다. 창덕궁이 남성들의 공간이라면 창경궁은 별궁(別宮)으로 여성들의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법궁으로서 임오군란(壬午軍亂·1882)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등 격변의 시기를 겪어온 곳이다. 창덕궁에 있는 단일 건물 중 가장 크고 중심적 역할을 했던 건물은 중희당(重熙堂)이었다.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건설했고 이후 세자궁으로 쓰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명성황후를 아내로 맞았고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 주로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고종은 창덕궁 시절 청나라나 서양의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었고, 중희당에서 사절들을 접견했다. 지금 중희당은 없어지고 그 자리는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로 변했다.

창경궁은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 그리고 아들 정조의 기구한 가족사의 현장이었다. 임금의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에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했다. 대비와 왕비의 침전이던 경춘전(景春殿)에서는 조선 왕조 부흥을 꿈꾸었던 정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慈慶殿)을 지었다. 혜경궁은 이곳에서 회갑이 되던 해부터 ‘한중록(閑中錄)’을 쓰기 시작했다.

창경궁에서 가장 비극적 장소를 꼽으라면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처소였던 낙선재(樂善齋)를 들 수 있다. 낙선재는 원래 국상을 당한 황후와 후궁들의 처소로 세워졌다. 고종은 갑신정변 이후 주로 낙선재에서 집무했고 순종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주로 낙선재에 거주했다. 영친왕 이은(李垠)과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도 여기서 살며 몰락해가는 왕조의 서글픔을 맛보았다.

1999년 출간된 궁궐 전문가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우리 궁궐 이야기’가 대중서라면 이 책은 꼼꼼히 각주까지 달아놓은 학술 연구서다. 건축물을 소개할 때마다 동궐도의 해당 부분과 궁궐 전문 사진작가의 현장 사진 236컷을 함께 실어 반듯한 왕궁 안내서를 만들어냈다.

창덕궁과 창경궁
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
1405년(태종5)완공 년도1484년(성종15)
남향방 향동향
돈화문(敦化門)정문(正門)홍화문(弘化門)
인정전(仁政殿) 법전(法殿)명정전(明政殿)
대조전(大造殿)침전(寢殿)통명전(通明殿)
선정전(宣政殿)희정당(熙政堂)보경당(寶慶堂)중희당(重熙堂)주요 전당(殿堂)문정전(文政殿)경춘전(景春殿)자경전(慈慶殿)환경전(歡慶殿)
현존 또는 복원한 76곳건축물 수현존 또는 복원한 30곳
터만 남은 14곳터만 남은 26곳
1839칸전당 칸수2379칸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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