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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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지음/135쪽 6000원 열림원

지난 10년간 시와 불화(不和)했던 시인 이성복(51)은 고백한다.

‘가속기와 브레이크 페달을 번갈아 밟을 때처럼 내 글쓰기가 지나친 갈망과 절망으로 울컥거리기만 할 때, 평소에 좋아하던 다른 나라 시에 말 붙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 관심사는 인용된 시를 빌미로 하여, 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시집을 펴내며’)

그는 “외국 시를 읽으면서 ‘글의 길’을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글을 만드는구나, 어떻게 시를 쓰든 결국 내가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시로구나….” 작가의 의도보다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얻는 부분을 생각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달의 이마…’에는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 시 한 구절과 그 시를 ‘렌즈’ 삼아 본 삶의 풍경 100편이 담겨 있다. 시인은 자의식도, 신경증적인 야심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신의 시어로 적어 내려갔다. 시인의 시는 일상의 단면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고 면벽한 채 토해 내는 독백이며 때로는 아포리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루 만에 다 자란, 방 안에 들여놓은 호랑가시나무 화분에 흰 버섯 하나.

‘언제 누가 오지 말란 적 없지만, 언제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니다. 잎 전체가 가시인 호랑가시나무 아래 흰 우산 받쳐 들고, 오래 전에 우리도 그렇게 왔을 것이다. 아내와 나 사이 딸아이가 찾아왔듯이. 언젠가 목이 메는 딸아이 앞에서 우리도 그렇게 떠날 것이다, 잎 전체가 가시인 호랑가시나무 아래 살 없는 우산을 접고, 언젠가 한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한 번 온 적도 없었다는 듯이’)

‘세계 위에, 지붕과 풍경들 위에,/내 몸을 풀어놓고 싶구나,/나의 꿈속에서는 쥐를 쫓는/불타는 욕망과 함께’라는 파블로 네루다의 ‘고양이의 꿈’을 지나온 시인은 말한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시인은 6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 10년 만에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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