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平常의 정치를 보고 싶다

  • 입력 2003년 10월 29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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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金賢哲)씨의 국정개입 비리의혹과 92년 대선자금 공개 문제로 정국이 하루도 조용할 날 없던 97년 5월 30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정치개혁이 좌초하면 ‘중대 결단’을 하겠다”는 요지의 대국민 담화로 온 국민과 정치권을 긴장시켰다.

차남 현철씨의 구속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YS의 이 한마디는 정치권의 화두(話頭)를 장악하는 ‘깜짝 카드’로서의 효과를 100% 발휘했다. 정치권은 중대 결단의 내용이 무엇일까를 분석하느라 바빴고, 그 와중에 정작 담화의 핵심이 됐어야 할 현철씨의 비리에 대한 사과 문제와 대선자금의 실체 규명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처럼 YS 집권 내내 계속된 ‘깜짝 개혁 쇼’와 정국 혼란의 뒤끝에 나온 정국 수습책에는 ‘평상(平常)정치’의 회복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번엔 또 뭐야’라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국민에게는 상궤(常軌)를 이탈하지 않는 정상적인 정치가 그리웠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3’ 회의 참석 중 심복인 최도술(崔導術) 총무비서관의 SK비자금 수수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눈앞이 캄캄했다”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귀국 직후인 10월 10일 재신임 카드를 던져 국민을 놀라게 했다.

물론 YS의 수법을 답습한 듯한 이 카드가 ‘승부수’로 먹히게 된 데는 ‘연내 국민투표 실시’를 앞세워 이 제안을 덜컥 받아들인 한나라당의 실착(失錯)도 크게 한몫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검찰 수사와 각 정파의 폭로극에 야당의 대선자금 특검 요구 등이 뒤엉켜 ‘죽기살기’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난타전은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 정치게임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되묻게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

특히 이런 식의 ‘깜짝 정치’에 익숙해 있는 우리 국민도 혼란스러운데 외국인들이 황당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최근 만난 한 외교 소식통은 “측근의 잘못이 있으면 검찰 수사를 지켜보고 책임질 일이 있으면 지면 되는 것 아니냐”며 ‘위헌성’ 지적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를 밀어붙이겠다는 청와대측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외교 소식통은 “한나라당에 대한 비자금 유입 사실을 검찰이 SK수사 초기에 진작 알았을 텐데 왜 이제 와 난리냐”며 “그렇다고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되는데 특검을 하자는 한나라당의 태도도 이해가 안 간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지금 상황이 민생이나 국가의 진로에 대한 논의를 내팽개친 채 ‘비상(非常)한 결단’으로밖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냐는 점이다. 무엇보다 경제에서 가장 큰 적(敵)은 앞날의 전망이 서지 않는 ‘불확실성’이란 점을 정치지도자들은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만난 한 중소기업인의 얘기가 가슴에 부딪쳐 왔다.

“얼마 전까지는 현금을 갖고 있으면 외환위기가 다시 닥쳐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현금을 갖고 있어도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여야 지도자들이 ‘정치게임의 승자’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머리를 맞댄 논의를 통해 정국 해법을 찾아내는 ‘평상의 정치’를 보고 싶다. 이런 국민의 바람은 아직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사치스러운 기대일까.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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