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치에 대한 야유, '인터넷 살생부'

  • 입력 2003년 1월 22일 18시 46분


민주당 의원 94명을 대통령선거 특등공신부터 역적 중의 역적까지 6단계로 분류한 ‘살생부’의 작성자로 자처하는 20대 공원이 나타났으나, 살생부 망령은 여전히 정치권을 배회하고 있다. 의원 38명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비난하는 제2의 민주당 살생부와 의원 40여명을 척결 대상으로 지목한 한나라당판 살생부도 나돌고 있어 분위기가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복면을 쓴 익명의 폭력이 추세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게 당장의 피해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앞으로 제4, 제5의 살생부가 유포될 가능성이 있고, 더 나아가 사회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입장이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비방하고 매도하는 ‘인터넷무고’나 ‘인터넷선동’이 횡행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인터넷문화혁명’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피해를 볼지 모르는 상황에선 국민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저한 추적으로 얼굴 없는 ‘저격수들’을 색출해 경각심을 안겨줘야 모방범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검찰과 경찰은 일벌백계의 자세로 잇단 살생부의 작성자와 작성 경위를 밝혀내야 한다. 20대 공원이 자복한 민주당 살생부의 작성 경위도 한번쯤 더 면밀히 살펴보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정치권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정치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를 담은 살생부가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 자체가 정치에 대한 지독한 야유일 수도 있음을 되돌아봐야 한다. 정체불명의 문건 때문에 정치권이 전례없이 ‘성명미상의 네티즌’을 상대로 검찰에 고발키로 하는 법석을 떤 것 또한 스스로 ‘제 발 저린’ 대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정치인의 정치적 생명은 궁극적으로 유권자에게 달려있는데, 선거 기여도에 따라 충역(忠逆)을 가르는 정치풍토는 정말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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