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二. 바람아 불어라…(8)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7시 46분


무슨 생각에선지 항우가 한 발을 들어 그 솥을 걷어찼다. 그 큰솥이 빈 대접 쓰러지듯 핑그르르 돌며 쓰러지고 담겨있던 물이 쏟아졌다. 항우가 들고 있던 장검을 땅에 꽂고 두 손으로 쓰러진 솥의 두 다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장정 대여섯은 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그 큰솥을 어깨위로 번쩍 들어올리며 사나운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이놈들! 이래도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요 기세였다. 거기다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함에 이어 불을 내뿜듯 한 눈빛이 쏘아 오니 마음 약한 군졸들은 제김에 놀라 창칼을 떨어뜨리며 마당에 폭삭폭삭 주저앉았다. 그때까지는 한 고을을 지키는 교위(校尉)답게 군졸들을 모아 달려온 주무(朱武)도 그 같은 항우를 보고는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항우를 뒤따라 객청에서 달려나온 항량이 다시 은통의 목과 인수를 번갈아 쳐들어 보이며 달래는 투로 말했다.

“주교위, 대세는 이미 정해졌소. 더는 천명을 거슬러 애꿎은 사람들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그러자 주무도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빼들었던 황급히 칼을 칼집에 꽂으며 소리쳤다.

“모두 창칼을 거두어라! 먼저 항대협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그 말에 그때까지 창칼을 움켜잡고 버티던 군졸들까지도 모두 창칼을 눕히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항우가 그제야 쳐들고 있던 솥을 내려놓고 발 앞에 꽂아두었던 장검을 뽑아들었다. 숨결 한번 흐트러짐이 없이 항량 옆에 가 서는 것이, 그야말로 힘은 산이라도 뽑을 듯[역발산]하고, 기세는 세상을 뒤덮는 듯[氣蓋世]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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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동헌[政廳]으로 갑시다. 그리로 가서 우리 회계군의 앞일을 함께 의논합시다.”

항량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 사이 제법 시간이 흘러 객청 안팎에서의 소동이 관아(官衙) 안에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군리(郡吏)들이 저마다 기둥 뒤에 숨어 일이 되어 가는 꼴을 지켜보다가, 항량의 그 같은 외침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어 동헌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도 세력 있는 몇몇은 그대로 항량의 사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진작부터 항량과 깊이 사귀어온 이들이었다.

항우와 주무를 좌우에 거느리고 동헌으로 들어간 항량은 제 편을 들어줄 군리들이 대강 다 모였다 싶자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따라 뛴다고, 은통은 제 욕심 하나만으로 망령되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소. 나와 환초를 장수로 세우고 우리 회계군을 밑천 삼아 천하를 다투려 했으나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이겠소? 천하는 공기(公器)이니 사사로운 욕심으로 다툴 수 있는 게 아니오. 하물며 저 무도한 진나라가 한줌의 군사들과 함께 우리를 쥐어짜려 보낸 군수 나부랭이에게 가당키나 하겠소? 자칫하면 우리 회계군은 여기저기서 몰려든 난군(亂軍)들의 싸움터가 되거나, 기운을 차린 진나라가 보낸 대군에게 쑥밭이 되고 말 것이오.

이에 나는 여기 있는 조카 우(羽)와 더불어 은통을 죽이고 회계군의 인수(印綬)를 거두었소. 하지만 진왕(陳王·진승)이 일으킨 바람은 거세고, 영웅들은 곳곳에서 그 바람을 타고 구름처럼 일고 있소.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 머지 않아 우리 회계군도 그 바람에 휩쓸릴 터, 무언가 이 땅을 지킬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되겠소. 모두 가슴을 터놓고 의논해 봅시다. 자, 이제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소?”

“대협께서 회계군을 맡으시어 이 땅과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군리(郡吏)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내심 기다리던 말이었으나 항량은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그리되면 내가 은통을 죽인 게 또한 사사로운 욕심이 되고 말지 않겠소? 그리할 수는 없소이다. 달리 덕 있는 이를 뽑아 군수로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인수까지 벗어 놓았다. 하지만 눈치 빠르기로 이름난 게 고을 구실아치[吏屬]와 아전바치[胥吏]들이라, 이미 대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훤히들 꿰고 있었다. 거기다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항우가 불길이 뚝뚝 듣는 눈길로 노려보고 서 있으니 어떻게 감히 딴 사람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 오중(吳中)에 항대협 말고 누가 그같이 큰일을 치러낼 수 있겠습니까? 이 땅과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회계군을 맡아주십시오.”

군리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간청하고, 항량이 풀어놓은 인수를 다시 갖다 바쳤다. 뜰에 있던 군졸들도 창자루로 땅바닥을 두드려 그런 군리들에게 찬동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래도 항량은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듯 받아들이며 말했다.

“좋소. 제공(諸公)들이 이렇게 간곡히 바라시니 잠시 이 군수의 인수를 맡겠소. 하지만 무릇 일이란 반드시 대의와 명분이 앞서야 하오. 회계 같은 큰 고을을 주고받는 일은 더욱 그러하오. 나는 조상 대대로 섬겨온 초나라를 되세우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선친의 한을 씻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소임이자 회계수(會稽守)를 맡는 구실로 삼겠소. 이는 공들에게도 내세워 부끄럽지 않을 대의명분이 되니 부디 힘을 아끼지 말고 거들어 주시오.”

그리고는 풀어놓았던 인수를 도로 거두어들였다.

항우를 앞세운 한줄기 질풍 같은 선공(先攻)으로 군아(郡衙)와 군리(郡吏)들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그걸로 회계군 군정(郡政)까지 모두 장악된 것은 아니었다. 군리들 중에는 겁이 나서 달아난 이도 있지만 항량 밑에 있기가 싫어 숨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유협(遊俠)과 토호(土豪)들도 모두가 항량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항량은 급하게 사람을 풀어 평소에 자신을 따르던 오중의 호걸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에게 각기 알맞은 벼슬을 주어 먼저 군아의 빈자리부터 채우고, 다시 그렇게 자리 잡아가는 권력을 바탕으로 자기 밑에 들기를 마다하는 건달 패거리나 지방 터줏대감들을 어르고 달래었다. 그리하여 군정을 장악하기 바쁘게 회계의 하현(下縣·속현)들에도 자기 사람들을 내려보내 관부(官府)를 거두어들이고 흔들리는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다독이게 했다.

회계군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세 군(郡)중에 하나로서, 치소가 있는 오현(吳縣·오중)이외에 곡아(曲阿) 무석(無錫) 단도(丹徒) 오정(烏程) 부춘(富春) 산음(山陰)등 26개 현(縣)에 22만호(戶), 100여만명의 인구가 있었다. 항량이 보낸 사람들이 그 모두를 장악하자 잠깐 동안에 강동에도 만만찮은 세력권이 하나 형성되었다.

항량은 초나라 부흥을 내세워 먼저 군사부터 모았다. 은통이 죽은 뒤 항복한 진나라 군사도 있고, 아우른 현군(縣軍)들도 있었으나 그들만으로는 부족했다. 좀더 정예하고 믿을만한 자신의 군대가 필요했다.

항량이 군사를 모은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믿고 그가 내세운 초나라 부흥의 대의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회계군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26개 현에 100만 인구를 가진 군(郡)이라 그 수가 금세 몇만이 되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다만 갈곳이 없어 밥이라도 얻어먹고자 따라나선 유민(流民)들도 적지 않았다.

항량은 모여든 이들 중에서 강동, 곧 옛 초나라 땅의 젊은이들만 8000명을 골랐다. 그리고 항우를 부장(副將)으로 세운 뒤 그들을 거느리게 했다. 그 뒤 항우가 몰락할 때까지 그의 주력으로 충성을 다하는 이른바 ‘8천 강동 자제(江東 子弟)’가 바로 그들이었다.

장수로 쓸 인재들도 모여들었다. 여번군(餘樊君)이나 종리매(鍾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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