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여행길에서 얻은 삶의 지혜 ´지구별 여행자´

  • 입력 2002년 12월 6일 19시 20분


◇지구별 여행자/류시화 지음/272쪽 9900원 김영사

머릿속에 불이 난 시인 류시화가 인도에 갔다. 버스 지붕과 반짝이는 소금사막, 어디에나 존재하는 생의 자리에서 그의 정신은 망고 열매처럼 익어갔다.

그는 여행을 떠날 때 따로 책을 들고 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나는 세상이 곧 책이었다. 시인은 여행 중에 진정한 홀로 있음을 알았고, 그 홀로 있음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배웠다. 여행길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15년에 걸쳐 해마다 인도와 네팔, 티베트 등지를 여행해온 명상 시인의 깨달음과 삶에서 얻은 교훈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 산문집에 송골송골 맺혀 있다.

:기차 안-모든 인간 존재에는 신이:

은근슬쩍 남의 자리에 끼어 앉은 무임승차 승객들로 북적이는 기차 안. 배불뚝이 검표원과 빈털터리 늙은 사두(힌두교의 고행 수도승)간에 논쟁이 벌어진다.

“(층층이 낀 눈곱, 뜻밖의 강렬한 눈빛) 무슨 표? 난 수십 년을 이렇게 자유롭게 신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사두)

“(비아냥거리며) 당신들은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요? 당신들은 늘 신은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하잖소.” (검표원)

“(핏발이 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그럼 이 기차 안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있소? 신이 있다면 어디 있는지 말해 보시오.”(검표원)

“(천천히 고개 돌려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신은 지금 내 앞에 서서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소. 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소. 신이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난 당신 안에서 신을 발견하고 있소.”(사두)

‘인간 존재의 완성을 이룬 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인가? 천하든 귀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선하든 악하든 모든 인간 존재에게서 신을 발견하는 자라고 비하르 요가 학교의 창시자 스와미 사티야난다는 말했다’.

:버스 지붕 위-큰 소리에 쓰러지는 영혼:

형형색색의 인도인들을 가득 싣고 달려가는 버스.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쉴새없이 울리는 삼류영화 음악. 사다리를 타고 버스 지붕으로 대피한 시인과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 노인.

“내 고향인 구자라트 지방의 언어를 사용하면 한 시간에 1루피(30원)이고, 힌두어를 사용하면 2루피, 영어는 5루피를 내야 하오.”

그러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신비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시인은 실망하고 마는데…. 싯다르타 왕자, 크리슈나 신,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인도 신화 등 첫 대목만 들어도 훤히 아는 이야기들이었던 것.

노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1분도 채 안돼 소리를 지르며 가로막을 수밖에. 마지막에 노인이 들려준 것은 “쓰러져라”하고 소리를 질러 나무를 넘어뜨리는 남태평양의 원주민 이야기.

나무에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에 대고 힘껏 소리를 지르면 결국 죽고 만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줄곧 소리를 질러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주장을 내세우며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 언제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눈만 뜨면 모두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른다. 이렇게 계속해서 소릴 지르다간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영혼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새점(鳥占)치는 남자, 시를 좋아하는 강도 두목, 홍수로 집을 잃은 가짜 백단향 목걸이 장수를 만나보자.

흙먼지 일으키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 이어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만남.

사람과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피어나는 평안과 충만함이 고단한 삶으로 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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