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고희경/대중 곁으로 간 오페라

  • 입력 2001년 11월 20일 18시 44분


1948년 고 김자경 선생이 주역을 맡았던 베르디의 춘희(라 트라비아타)로부터 시작된 한국 오페라의 역사도 50년을 훌쩍 넘었다. 전쟁 중에도 공연이 멈추지 않았던 우리나라 오페라의 현실이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올 가을에는 서울에서만 15편의 오페라가 공연되어 오페라 제작 편수는 한국 오페라 역사상 최대치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 냉담했다. 가을 시즌을 먼저 시작한 몇 편의 오페라들이 졸속 제작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대중적인 오페라 레퍼토리들이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새로운 고객창출 실험▼

오페라 전용극장을 갖고 있는 예술의 전당도 1년에 두어 편의 오페라를 직접 제작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98년에 시작된 ‘오페라 페스티벌’이다. 올해 오페라 페스티벌에 선택된 작품은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1901년에 세상을 뜬 베르디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세계적인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예술의 전당이 올해의 작품으로 내세운 오페라다.

‘가면무도회’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국내에서 자주 상연되지 않았고, 대중적인 아리아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오페라다. 3막의 가면무도회 장면에서는 100명에 가까운 출연진이 무대에 오르는 등 제작비도 만만찮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1년 전부터 역할에 맞는 성악가를 캐스팅하느라 여러 차례 오디션도 가졌고 본격적인 연습만 3개월 이상 진행하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했지만 작품이 갖는 대중성의 한계는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게다가 공연시기 또한 한바탕 ‘졸속 오페라 시비’가 휩쓸고 지나간 시즌 후반부로 잡혀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오페라를 편하게 만드는 원칙(?)이 있다.

첫째, ‘라 트라비아타’ ‘라보엠’ ‘카르멘’과 같이 제목만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오페라를 고른다.

둘째, 다섯 번 공연에 다섯 팀의 성악가들을 출연시켜 배역들이 제대로 무대연습을 하든 말든 출연진이 동원하는 관객들로 객석을 가득 채운다.

셋째, 무대 디자인이나 의상을 이탈리아 어느 시골 창고에서 빌려와 스태프 이름에 이탈리아어를 몇 자 넣는다.

마지막으로 그럴듯한 제작 제안서를 정부에 제출해 지원금을 받는다.

이 ‘원칙’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공연장에 온 관객들은 오페라라는 장르가 ‘노래는 불안하고 무대는 엉성한’ 공연이라는 인상을 갖는다.

이런 대원칙(?)을 모두 무시하며 오페라를 만들어온 예술의 전당이 올해 또 한번 도전하면서 나름대로 작품 성패의 기준을 ‘새로운 관객층으로부터 감동을 만들어내느냐’에 두었다. 오페라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예술의 전당의 고집이 충분히 받아들여진다고 믿고 있었지만, 새로운 고객 창출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모 증권사 우수고객 초청행사로 마련한 ‘가면무도회’ 둘째 날의 5회 공연에서 이런 반응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패션쇼 같은 이벤트성 고객 초청행사만을 해온 증권사는 올해 처음으로 오페라에 자사 최고의 고객들을 초청했던 것이다.

실무자들은 이번 선택이 고객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다소 전전긍긍해하는 눈치였다. 작품에는 자신이 있어 기업 관계자들을 계속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나 역시 ‘열린 음악회’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성 공연에 익숙해진 일반 관객들이 과연 얼마나 작품에 몰입해 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공들여 만들면 관객 만족▼

공연이 시작되고 중간 휴식이 지나자 비로소 증권사 관계자들의 얼굴이 펴지기 시작했고, 마지막엔 대만족을 표시했다. 여인에 대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조국을 죽음으로 지켜내는 주인공의 이야기 등이 아름다운 선율 속에 녹아 관객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간 것이다. 오페라 관객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음악적 소양과 지식이 필요하다는 선입견도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가을 오페라 시즌도 서서히 막이 내려가고 있다. 내년 작품을 기획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주변에서 안이한 오페라 제작으로 ‘판’을 깨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좋은 작품은 관객들이 먼저 안다.

고희경(예술의 전당 공연기획팀장)

prangel@s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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