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신화' 무죄판결]청소년만화 성인물과 다른 새잣대 이용

  • 입력 2001년 6월 14일 18시 50분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던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해 14일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린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잣대’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판결문에는 기존의 획일적인 잣대로 작품의 음란성과 잔인성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만화라는 특수한 장르와 청소년이라는 구독 대상층을 고려한 새로운 기준을 담고 있다.

재판부가 적용한 음란성과 잔인성의 개념은 기존 대법원 판례 그대로여서 1심 재판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만화의 특성 및 음란성 잔인성 판단의 특이성 △만화의 시대적 배경 및 구독 대상에 따른 판단이라는 두 기준을 통해 재판부는 “만화는 영화나 소설 등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청소년물은 성인물과 다르게 판단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선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내용을 찬찬히 읽기보다는 대충 보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보통이고 그 내용이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난다고 믿지 않는다. 또 흑백으로 돼 있는 특성상 총천연색으로 보여지는 TV나 컴퓨터 게임보다 자극성이 덜하다”는 것이다.

또 독자층에 있어서도 다소 나이가 많은 청소년이 주 독자층인지 아니면 연령이 낮은 청소년이 독자층인지에 따라서도 판단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 재판부가 설정한 기준의 하나다.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천국의 신화’를 들여다보면 “집단 강간을 표현하는 한 장면만을 제외하고는 전혀 음란한 표현이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잔인성에 대해서도 “만화라는 특성상, 또 이 만화를 신화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관심이 있는 15세 이상의 미성년자들이 주로 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잔인성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에 재판부가 제시한 기준은 유사한 사례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이번 판결을 법원과 검찰의 ‘음란물 처벌 완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청소년 만화의 음란성과 잔인성 판단 기준을 새롭게 구성해 적용한 것일 뿐이며 음란물을 지금보다 더 허용해야 한다는 취지는 전혀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재판부가 이날 적시한 4가지 기준 중의 하나에는 “청소년 음란물의 경우 ‘예술’과 ‘사상’을 핑계로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도 있는데 이는 청소년 음란물의 처벌 범위를 더욱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이현세씨 일문일답▼

만화가 이현세씨(사진)는 ‘천국의 신화’의 음란성 여부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은 직후 “앞으로는 열정을 갖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뻐했다.

-무죄판결을 받은 소감은….

“기쁘다.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법원이 만화에 대해서도 다른 대중매체와 동일하고 보편적인 정서를 인정해 줬다는 것에 대해 감회가 남다르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뒤 작품활동을 중단했다가 최근 다시 창작 의도를 밝혔는데….

“이 사건으로 신바람과 열정을 잃어버려 3년 동안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국의 신화’ 후속편을 기다리는 독자가 많았다. 무엇엔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 에너지로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려 했다. 이제는 그 에너지에다 열정과 기쁨을 합쳐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청소년판은 계속 출간할 계획인가.

“그렇다. 성인용으로 시작한 만화였지만 정말 읽게 하고 싶은 독자는 청소년이다. (이 작품의 주 소재인) 역사는 청소년에게 훨씬 중요하다.” -1심 재판부는 집단성폭행 장면을 문제삼았는데….

“환웅이 야만세계에서 집단성폭행하는 모습을 보고 응징하는 장면을 스케치로 표현했다. 작품 제작 당시에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성적 충동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할 것으로 보이는데….

“양심에 따라 무죄를 주장해 왔다. 상고심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응할 것이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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