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위조그림' 판치는 유명 미술관

  • 입력 2001년 4월 12일 18시 44분


니컬러스 터너가 폴 게티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임명되기 1년 전인 1993년. 그는 이미 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드로잉 작품 중 일부에 문제가 있다고 직감하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드로잉 큐레이터로 평가받는 그가 가장 먼저 의심했던 것은 라파엘의 것으로 알려진 드로잉.이 위조품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터너가 위조품이라고 확신하는 작품은 여섯 개로 늘어났다. 모두 르네상스시대 거장들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들이었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 나중에 완성된 회화의 스케치로서 역사적으로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가격도 비쌌다. 게티 미술관은 1988년부터 92년 사이에 이 여섯 점을 사들이는데 100만달러 이상을 지불했다.

터너가 이들 작품을 의심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우선 누군가가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낡아 보이게 만든 것 같았다. 또한 잉크의 색이 바래는 과정도 인위적으로 가속화한 것 같았다. 옛날의 거장들이 사용했던 철 성분이 들어간 잉크는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옅어지는 게 아니라 더 짙어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드로잉의 선도 진짜 거장들의 작품처럼 유려하지 못했다. 또 기존 작품의 좌우를 뒤집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듯한 흔적도 보였다. 예를 들어, 게티 미술관이 34만9000달러를 주고 사들인 데지데리오 다 세티냐노의 드로잉에서 맨 아래쪽에 있는 인물과 왼쪽 가장자리에 있는 인물이 좌우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방법은 위조 전문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드로잉은 심지어 독일의 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케치를 좌우만 뒤집어 그대로 본뜬 것 같았다.

이렇게 의심이 가는 작품을 시험할 때 작품의 위아래를 뒤집어 거꾸로 들고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그림이 정상적으로 걸려 있을 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림에서 발견되는 미묘한 문제들을 알아서 머리 속으로 수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미리부터 전체적인 이미지를 머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아래를 뒤집으면 그림은 추상적인 선과 모양의 집합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터너는 라파엘의 드로잉을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드러났다. 그림 속 인물의 겨드랑이에 있는 살이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되어 있었고, 발은 뭉툭하게 보였다.

터너가 이런 증거들을 하나하나 수집한 결과 이 작품들이 영국의 악명 높은 위조 전문가인 에릭 헵번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헵번은 40년이 넘도록 세계 최고의 미술관들을 속여 위조품을 팔았던 인물이었다.

터너는 1996년 2월 27일에 당시 게티 미술관 관장이던 존 월시와 부관장 데보라 그리번(현 관장)에게 문제의 드로잉들을 보여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이 같은 의견을 미술관 이사회에 서면으로 알려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터너의 주장에 따르면, 일주일 후 월시 관장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 후 게티 미술관과 터너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터너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부당하게 축소돼 새로운 작품을 사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드로잉 부서에 전시공간이 충분히 할당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터너는 1997년 12월에 미술관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법정 밖에서 양측이 합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합의를 통해 터너는 미술관으로부터 수십만 달러의 돈과 작품 위조여부에 대한 자신의 책을 출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터너는 이 합의의 내용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게티 미술관의 큐레이터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터너의 책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다. 게티 미술관은 처음부터 이 책을 묻어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만약 이 책이 출판된다면 문제의 작품들을 사들였던 터너의 전임자 조지 골드너가 미술관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리라는 것이 미술관측의 주장이었다.

터너와 게티 미술관이 벌이고 있는 이 싸움의 의미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매년 게티, 메트로폴리탄, 프라도 등 유명 미술관을 찾는 수천만명의 사람들은 작품의 진위여부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작품을 감상한다. 그런데 게티 미술관은 자신이 고용한 전문가의 입을 막아버림으로써 상업적 정치적 고려가 예술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미술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낸 꼴이 됐다. 일단 작품의 진위여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후, 폴 게티 정도의 미술관이 당사자에게 침묵을 강요한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학자들 중에는 미술관과 미술 거래상들이 맺고 있는 비밀스러운 관계를 문제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향력이 큰 일부 거래상들은 자신들의 상품인 미술작품을 미술관에 대여해서 1년 정도 전시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출처가 의심스러운 별 것 아닌 작품의 가치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거래상들은 미술관에 거액의 보증을 서주기도 한다. 따라서 미술관은 이들 거래상이 제시하는 미술작품의 구매를 거절하는 경우, 중요한 재정조달원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터너는 현재 영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이제 미술관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됐다면서 “미술관의 직원들은 조직 내의 정치적 문제에 휩쓸려 있으며, 미술관은 훨씬 더 관료적인 곳으로 변했다. 대규모 전시회는 대중을 위한 오락이 되었고, 떠들썩한 구경거리가 진지한 연구를 압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http://www.nytimes.com/2001/03/18/magazine/18FAK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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