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외

  • 입력 2000년 12월 29일 19시 43분


◇내가 요즘 읽는 책-박지향

▽선인들 여유 어디로 갔나

십수년 전 유학시절, 호기심으로 구한말 우리나라를 다녀간 서양인들이 남긴 여행기를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예상보다 엄청나게 긴 목록을 보면서 은자의 나라로 불리던 한국에까지 그런 관심의 촉각을 뻗친 서양인들이 감탄스럽기도 하고 섬칫하기도 했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록키산맥과 양자강 연안을 헤집고 다닌 이자벨라 비숍은 청일전쟁 직전에 조선에 왔다. 영국 하원의원이며 훗날 인도 총독과 외무장관을 지낸 촉망받는 정치인 조지 커즌 경도 비숍 여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을 다녀갔다.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집문당, 신복룡 역주, 2000)에서, 커즌은 ‘100년 전의 여행, 100년 후의 교훈’ (비봉, 라종일 역, 1996)에서 조선에 대한 인상기를 남기고 있다. 대개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왔기 때문에 이들의 여행기는 이웃나라들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들의 눈에 조선은 어떻게 비쳤을까? 커즌의 여행기는 일본의 열띤 근대화 작업과, 그에 비해 한심할 정도로 정체되고 옛것을 고집하는 조선을 비교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서양 모방에 신물이 난 비숍은 오히려 정체된 조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보다 10여년 전에 집필한 ‘일본의 오지’에서 일본을 평한 것보다 한결 부드럽고 동정적으로 한국을 묘사하고 있다.

동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간에 서양인의 눈에 비친 전형적인 조선사람은 긴 담뱃대를 물고 몽상으로 하루를 지내는 게으른 자다. 물론 여성은 그렇지 않다. 흰옷을 고집하는 ‘주인’인 남편을 위해 밤늦게까지 다듬이질을 하는 조선의 여인은 ‘빨래의 노예’이며 근면의 상징이다.

이들이 조선을 다녀간 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비숍과 커즌이 만약 오늘의 한국을 본다면 아마 빨리빨리를 외치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지금의 한국인이 100년 전 ‘그 조선사람’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이다.

결국 민족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민족은 한 세기만에 세상에서 가장 성급한 민족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물론 서양인들의 관찰이 순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서술에 나타나는 서양의 자기중심주의, 타자에 대한 거리 두기 등은 분명히 해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타자에게 어떻게 표상되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나 역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리라.

새로운 백년을 맞이한 지금, 백년 전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는 일은 백년 후 비숍과 커즌의 후예들이 우리를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박지향(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