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마르시아스 심/이봉주 투혼에 삶의 진리 있다

  • 입력 2000년 12월 5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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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는 마라토너로서 불리한 신체 조건을 가진 선수다. 무엇보다 짝짝이 다리로 달린다는 사실이 그렇다. 키도 작고 다리도 짧다. 어눌한 말씨며 숫된 몸짓, 쌍거풀 수술을 했다지만 여전히 답답하게 치켜뜬 눈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를 보면서 나는 구한말 의병의 모습을 떠올린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입술을 비틀어 물고 조총을 꼬나든 남루한 행색의 조선인이 생각난다.

그런 이봉주가 3일 일본 후쿠오카마라톤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 쾌거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시드니올림픽에서 겪은 부진을 보란듯이 극복했다는 점이다. 불리한 제반 조건과 세상의 냉소를 탓하지 않고 그는 마라톤에 대한 애정과 오기를 동원해 야박한 세상에 대해 유쾌한 복수를 완성했다.

인생을 한 장의 인화지에 옮겨놓으면 스프린터가 아니라 마라토너의 모습이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다. 하지만 인생이 아름다운 까닭은 좌절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봉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경기 결과는 그런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준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경기가 시작될 때 나는 TV를 통해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마를 질끈 동여맨 띠에 새겨진 태극 무늬를 보면서 걱정이 됐다. 저러다가 좋은 성적을 못내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다. 함께 선두 그룹에서 달리던 후지타(富士通)선수의 이름을 보면서도 역시 일본의 신산(神山) 후지산과 닮은 저 이름의 주인공이 좋은 성적을 못내면 일본인들이 얼마나 무안해 할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결국 두 선수는 두 나라 국민의 자존심을 지켰다.

결과만 보면 이봉주보다는 우승자인 후지타가 우월한 게 사실이다. 그는 경기의 승자이며 월계관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준우승자인 이봉주야말로 진정한 승자이며 환호와 존경의 대상이다. 28km 지점에서 보여준 후지타의 패기에 찬 기교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스포츠는 단순한 경쟁이기 이전에 성실한 육신의 단련이며 그 결과를 보여주는 제의(祭儀)다. 함께 달리는 경쟁자를 떠보고 유도하는 기술은 잔재주에 속한다.

그에 비해 이봉주는 근기와 집념으로 마라톤의 본질과 품격을 지켰을 뿐더러 스포츠맨으로서의 겸허함도 버리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앞선 3명의 경쟁자를 추월하는 투혼도 그랬다. 결승점까지 최선을 다해 질주하는 모습이야말로 마라토너의 자세다.

이봉주는 기교와 패기로 이뤄진 승리만이 아니라 우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불굴의 의지야말로 진정 삶의 자세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이봉주를 위대한 마라토너로 존경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봉주는 비교 우열을 통해 생의 성패를 가리는 우리의 저급한 분별을 나무라며 불리한 조건에 낙망하고 순간의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우리를 깨우쳐주었다. 이 위대한 마라토너는 쓰러졌던 땅을 짚고 일어나 다시 달려나가는 성실성만이 진정 승자의 조건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마르시아스 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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