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그늘 私債]'돈 빌린죄' 인생 망친다

  • 입력 2000년 11월 26일 19시 31분


《잇따른 대형 금융사고가 우리나라 금융권의 추악한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그 이면에서 서민들의 사채 피해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증하고 있다.

사채시장을 찾는 발길이 크게 늘어난 이유는 불황이 계속되면서 한때 줄었던 신용불량자 등 제도권금융 이용에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급증했기 때문. 실제 신용불량자 숫자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따라서 몇십만, 몇백만원의 사채로 집이 경매에 넘겨지는가 하면 사채업자들의 협박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정신병에 걸리거나 야반도주,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피해를 막을 법적 장치는 전혀 없다. 사채시장에 대한 감독기능은 없는데다 그나마 일부 규제기능을 하던 이자제한법이 98년1월 규제개혁 차원에서 폐지되면서 연리 300% 이상의 폭리라도 법원은 늘 사채업자의 손을 들어줄 뿐이다.

최근 심각한 문제로 비화하고 있는 사채시장의 피해사례와 대책 등을 점검한다》

▽양산되는 신용불량자들= 99년말 225만명(법인 포함)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신용불량자는 올초 경기가 좋아지고 '소액 연체자 사면조치' 가 내려지면서 한때 소폭 감소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6월을 기점으로 신용불량자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 10월말 현재 99년말보다 13만여명이 더 많은 238만명에 이르렀다. 국민 20명당 1명꼴로 신용불량자인 셈이다. 특히 신용불량자 증감은 6개월 전의 경기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증가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는데 제약이 큰 이들이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이용할 수밖에 없고 어떤 고리(高利)도 현행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데에서 발생한다.

신용불량자들의 모임(www.credit815.org) 석승억(石承億·33)대표는 "신용불량자가 되면 담보나 연대보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전혀 제도금융권을 이용할 수 없다" 며 "급한 마음에 사채를 썼다가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고 털어놨다.

▽잇따르는 피해들= "회사나 집에 밤낮없이 전화를 걸어와 온갖 욕을 해요. 눈을 빼버리겠다, 납치하겠다 등등…."

24일 빌린 금액의 무려 2.3배인 140만원을 사채업체 계좌에 입금한 뒤 회사원 A씨(26·여·서울 중랑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60만원을 빌린 기간은 26일에 불과했다.

신용카드대금 연체로 신용불량자가 된 이씨는 "이자를 하루만 늦게 입금해도 원금의 5%가 연체료로 붙었다" 며 "너무 무섭고 겁이 나 온갖 돈을 끌어다 간신히 막았다" 고 털어놨다.

지난해 10월 한 사채업자로부터 2600만원을 빌린 천모씨(42·여)는 그 뒤 11차례에 걸쳐 2억8700여만을 뜯겼다. "아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만들겠다" 는 등의 협박 때문에 이자 연체료 등을 그만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단돈 몇백만원을 사채업자에게 빌린 뒤 연체이자를 갚지 못해 협박당하던 가정주부가 8월 제초제를 먹고 자살하는 등 극한상황도 급증하고 있다. 경찰은 사채업자들이 돈을 받아내기 위해 미혼여성을 윤락업소에 넘기거나 채무자 자녀를 납치하고 흉기로 위협하는 등의 악랄한 수법을 적발하기도 했다.

압류물건 경매에 전문적으로 참여하는 한국동산경매정보㈜ 양원준(梁源埈)사장은 "법원 경매에 나오는 동산(動産)물량중 20% 가량이 사채업자들이 내놓은 채무자의 물건으로 추정된다" 고 밝혔다.

<이헌진기자>mungchii@donga.com

▼사채시장 고리실태▼

"대략 월 30% 정도가 요즘 시세예요."

한 사체업자는 90년대 중반까지 은행이율의 7∼8배 수준이던 사채 이자율이 IMF 이후 폭등을 거듭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생활정보지 등에서 '급전' '신용대출' 등을 내건 10여곳의 사채업체를 무작위로 추출해 알아본 결과 전세계약서를 담보로 해도 이자는 열흘 단위로 원금의 10% 수준이었다. 연 365%에 이르는 엄청난 폭리인 셈. 물론 원금의 20∼40%는 이자 공증료 등의 명목으로 먼저 제했고 연체 이자도 하루 단위로 5%였다.

'사채 아님' 이라고 광고한 몇몇 업체는 월 7%, 연 84%의 이자율이었다. 그러나 전국에 지점망을 갖춘 이 업체들도 이자만 조금 쌀 뿐 온갖 '올가미' 를 마련해 놓고 있어 채무자를 망하게 하는 행태는 여느 사채업체들과 다르지 않았다.

사채업체들은 돈을 떼이지 않기 위해 각종 '안전망' 을 깐다.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는 채 인감증명서와 주민등록등초본 등을 내야 하고 전세계약서는 당연히 담보로 잡힌다. 또 △급여를 압류할 수 있는 서류 △유체동산 양도계약서 등을 작성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원금의 2∼3배에 이르는 약속어음 한 장과 백지 약속어음 한 장 등 2장을 공증받는다. 이 모든 것은 협박 등이 먹히지 않을 경우 압류하거나 민형사소송 등에 대비하기 위한 것.

한 전직 사채업자는 "연체가 이어지면 일단 급여를 압류하고 집안 물건들을 경매에 붙인다" 며 "그래도 모자라면 채무해결사들로 구성된 '진상처리반' 을 동원, 갚을 때까지 온갖 협박과 공갈을 통해 직장을 못다니게 하거나 가족 친지들에게 피해를 입혀 극한상황으로 몰고간다" 고 밝혔다.

사채업자들이 돈을 가장 잘 빌려주는 부류는 협박이 잘먹히고 돈 떼일 염려가 비교적 적은 '공무원 군인 미혼여성 가정주부 등의 순서' 라고 그는 덧붙였다.

▼사채피해 대책은 없나▼

'돈 빌린 죄' 에 따른 이같은 극한상황을 해결할 길은 사실상 없다. 우리나라 사채시장은 누구도 감독하지 않고 단속 대상도 '카드깡' 업자에 불과하기 때문.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또 채무자들이 협박 폭행 등을 당할 경우 형사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으나 사채업자들이 대부분 폭력조직과 연계돼 있어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신성식(申成植)변호사는 "현행법상 사채시장의 고리를 규제할 방안이 전혀 없다" 면서 "피해자들이 법에 호소해도 100% 패소하는 만큼 적정수준으로 이자를 제한하는 법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 고 말했다.

또 이자제한법이 있더라도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 는 각서 등 이면계약이 성행, 법망를 피해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도 시급하다.

상명대 정지만(鄭智晩·경제학과)교수는 "지금은 대형 금융사고의 그늘에서 빈발하는 사채 피해에 주목해야 할 때" 라며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라도 사채를 양성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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