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의료체계 완전히 새 틀 짜자"

  • 입력 2000년 8월 31일 18시 33분


코멘트
31일 의료계가 내놓은 요구안을 보면 의약분업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후진적’이라는 것을 정부가 인정하고 이를 의료계 중심으로 완전히 뜯어고쳐 새 틀을 짜야 한다는 주장으로 집약된다.

공을 넘겨받은 정부는 “의료계가 일단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것으로 본다”면서도 구체적인 요구안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며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정부내 분위기는 “무리한 요구가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편이라 협상이 시작되더라도 상당한 난관이 예상된다.

의료계 대정부 요구안 주요 내용
분야내용
의약분업△약국 판매 일반의약품 포장단위를 7일 복용량 이상으로 하고(현재 약사 자율) 낱알판매 금지 당장 시행(현재 5개월간 유예)
△안전성 확보되고 남용 위험 없는 의약품 슈퍼에서 판매
△생물학적 약효동등성이 인정된 의약품에 한하여 환자의 동의하에 대체조제 허용. 단, 의사가 사전에 대체조제 불가를 표시했을 때는 어떤 경우에도 대체조제 금지(현재는 단순히 성분이 같은 약도 약효동등성에 포함)
△지역의약협력위원회 규정을 삭제하고 상용의약품 목록은 지역 의사회에서 지역 약사회에 통보(현재 의사 약사 협의로 목록 정하게 돼있음)
△처방전 1장만 발행하고 진료비 명세서에 처방약 내용을 기록하지 않을 것(현재 2장 발행해 환자가 1장 보관)
의료보험 수가
및 재정
△진찰료 및 보험료율을 OECD수준으로 현실화할 것
△88년부터 지급하지 않은 지역의보 국고지원액 5조3000억원을 당장 지급할 것
의료발전
특별위원회
△대통령 직속 상설기구로 할 것(현재 국무총리산하 6개월 한시기구)
△부위원장과 위원의 50%이상을 의협 추천을 받은 의사로 할 것
의료전달체계△보건소는 전액 국고보조로 운영하고 의료보호제를 확대할 것
△3차기관이 1차의료 대상자를 진료할 때는 비급여처리하고 의료기관별 차등수가제를 도입할 것
의사 수급△의대정원을 현재의 70%로 감축할 것
기타△복지부 내에 의사를 실장으로 하는 보건의료정책실 신설
△의료분쟁조정법 완비하고 분쟁 보상금을 국고에서 지원하는 방안 마련

▼의료계 요구안 분석▼

지난달 12일 구성된 비상공동대표 10인 소위는 지금까지 약 20회에 걸쳐 회의를 가진 뒤 ‘완전 의약분업 실시’라는 대원칙 하에 현 의료체계를 대수술하는 요구안을 확정했다. 일부 개원의들이 ‘일본식 임의분업’을 거론하고 또 소아과 신경과 정신과의 경우 의약분업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놓았지만 이런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대한의사협회 노만희(盧萬熙)총무이사는 “개별 이해관계가 걸리는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으며 ‘교과서적 진료체계 확립’을 주장한 전공의들의 생각이 상당히 반영됐다”고 말했다.

우선 눈에 띄는 대목은 일반의약품의 최소 포장단위를 30알 이상으로 하자는 당초의 주장에서 한발 물러서 용법 기준 7일 이상으로 하자는 대안을 제시한 것. 예컨대 ‘콘택600’처럼 약효가 24시간 지속되는 의약품은 7정 이상, 12시간 지속되는 의약품은 14정 이상 등으로 포장단위를 다양화하자는 논리다.

미국처럼 타이레놀 박카스 등 부작용이 없는 슈퍼마켓판매(OTC) 의약품을 분류해 환자들이 슈퍼마켓 편의점 등에서 약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과 약사가 의료인이 아닌 만큼 약국을 보건의료기관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은 약사들의 강한 반발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이 두가지 요구는 약사의 권한을 의사의 처방전에 따른 조제 및 일반의약품의 단순 판매에 국한시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의료계는 이와 함께 약사 또는 제약회사의 입장, 국민 부담 증가 우려 등을 생각하면 ‘짜깁기’식의 제도가 굳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갖가지 요구안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일반의약품 낱알 판매 금지 5개월 유예조치 철회라든가, 의약분업 예외지역 최소화, 보험료율 인상 등이 그런 항목이다.

▼정부 반응과 협상 전망▼

전공의 대표 안성준씨는 특히 의보 국고 지원 50% 이행을 위한 법제화 촉구와 관련해 “정부가 의보 재정이 고갈 상태에 이르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의약분업을 실시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공동대표 소위는 구속자 석방, 수배자 해제 등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소위 관계자들의 입에서는 “무조건 무죄 방면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정부가 성의를 보이라는 뜻”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날 전공의 비대위 김명일위원장이 풀려나고 이날 한광수(韓光秀)서울시의사회장과 최덕종(崔德鍾)의쟁투위원장 직무대리가 보석으로 석방된 것이 의정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협상 재개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으나 협상이 시작되더라도 타결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소위의 대표격인 의권쟁취투쟁위원회 김세곤(金世坤)중앙위원은 “국민건강 100년 대계를 위한 정당한 요구로서 정부가 못 들어줄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정부는 이날 의약분업 관계자 회의를 갖고 세부사항 분석에 들어갔다. 최선정(崔善政)보건복지부장관도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명했으나 의료계의 요구사항은 한결같이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다.특히 의약품 재분류는 상당한 시간과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이밖에 △그동안 밀린 의보 국고지원 5조3000억원 즉각 지급 △이미 구성된 보건의료발전특위의 전면 재구성 △의대 정원 70% 감축(정부안은 10% 감축) 등은 정부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요구사항으로 꼽힌다.

<정용관·김준석기자>yonga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