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펀드 운용내역 전문용어 투성이…내달 공시제도 강화

  • 입력 2000년 8월 15일 19시 22분


‘투신사에 돈을 맡기고 나서 마냥 기다리지 말라. 수시로 유가증권 매매내역을 살펴 부당한 운용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해야 한다. 그것은 펀드 가입자의 권리이자 의무다.’

신문기사에서 투신 수익증권 가입고객들에게 상투적으로 하는 당부. 그러나 실제로 펀드 운용내역을 점검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영업창구에서 제공하는 운용내역은 일반인들에겐 ‘암호’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전문용어 투성이인 데다 정보도 제한적이기 때문. 투자신탁 공시제도가 예전보다 강화됐다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펀드운용의 투명성을 확보하기는 아직도 먼 셈이다.

▽실제로 해보니…〓7월31일 여의도 모 투신사 본점 영업부를 찾아가 하이일드펀드 통장을 내밀고 “운용내역을 보고 싶다”고 요구했다.

작년 11월부터 판매된 하이일드펀드는 투자부적격 회사채(신용등급 BB+이하)를 편입하기 때문에 위험이 높은 펀드. 대신 세금우대 혜택과 공모주청약 메리트가 있다. 신탁재산으로는 당연히 채권과 주식을 주로 사들인다.

7월31일 현재 이 펀드에서 갖고 있는 주식내역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채권내역은 이틀 뒤에야 팩시밀리로 받았다. “운용사에 의뢰해 따로 뽑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는 설명.

주식내역에는 한국가스공사 48.6%, 아시아나항공 6.9%, 한강구조조정기금 4.4%라는 식으로 종목명과 투자비중이 나타나 있다.

채권내역은 종목명 수량 이율 반영률 발행일 상환일 보증기관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선수(전문가)들’끼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하고 얼마나 운용을 잘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정작 알고 싶은 것들〓주식의 경우 특정종목을 언제, 얼마에 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펀드매니저가 주식운용으로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 손해를 봤는지 알 방법이 없는 형편.

채권은 더욱 난감하다. 하이일드펀드 후순위채(CBO)펀드 등 투기등급 채권을 사들일 수 있는 펀드의 가입자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회사채의 신용등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고객들은 자신의 펀드가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해당 투신사 관계자는 “기업상황에 따라 신용등급이 수시로 바뀌는 데다 꼬치꼬치 캐묻는 고객들도 거의 없어 곧바로 자료를 뽑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다른 투신사들도 비슷하다. 몇몇 투신사는 ‘투명한 운용’을 강조하며 운용내역을 공개하겠다고 떠들었지만 실제로 고객들이 알고 싶어하는 내용을 제대로 공시하는 곳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펀드공시 강화된다〓현행 법령상 신탁재산 운용보고서, 영업보고서, 사업보고서 등 법정 공시서류 외에 펀드 투신사가 의무적으로 가입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서류는 없다.

극단적으로 ‘편입채권의 신용등급 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해도 투신사에서 줄 수 없다고 잡아떼면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하는 것.

그러나 이르면 9월부터는 고객들이 요구할 수 있는 ‘장부서류’가 증권투자신탁업 감독규정에 명시된다.

금융감독원은 △신탁재산으로 사들인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 내역 △펀드의 재무제표와 그 세부내역은 물론 △유가증권 매매거래 내역서까지 공개하도록 할 계획이다. 다만 지나치게 세부적인 매매내역서와 투신사 내부서류인 ‘운용지시서’는 투신사가 정당한 이유를 대 공개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할 방침.

금감원 관계자는 “미국에서와 같이 고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제로 자료를 만들어 내놓도록 지도하겠다”고 말했다.

<정경준기자>news91@donga.com

▼꼭 알아야 할 가입자 권리▼

제 아무리 법이 잘 정비돼 있어도 투신 고객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헛일이다. 증권투자신탁업법 및 세부법령이 보장하는 수익증권 가입자의 권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본다.

①간이투자신탁 설명서〓일선 창구에서 펀드를 고를 때 필수적인 자료. 금융감독원은 이해하기 힘든 상품약관이나 두꺼운 투자신탁 설명서 외에 1∼2장짜리 간이설명서를 비치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투자판단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돼 있다.

②상품설명 요구〓상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만약 설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펀드에 가입했다가 분쟁이 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충분한 설명을 했는지에 대한 입증책임(증거를 대야 할 책임)은 판매사쪽에 있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해선 녹취를 하거나 메모를 하는 것도 좋다.

③신탁재산 운용보고서〓투신사는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씩은 수익증권의 기준가격이나 손익상황, 신탁재산 내역, 매매내역 등을 고객들에게 알려야 한다. 주식회사가 반기(半期)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통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④영업보고서·사업보고서〓영업보고서는 분기(3개월)마다, 사업보고서는 1년마다 작성해 금감원과 투자신탁협회에 비치, 공시해야 한다. 고객들은 금감원이나 투신협회를 직접 방문, 열람하거나 인터넷(www.fss.or.kr 또는 www.kitca.or.kr)으로도 운용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⑤신탁재산 외부감사보고서〓일정규모 이상의 회사가 독립된 외부감사인에 의해 감사를 받아야 하듯 펀드도 외부감사를 받아 보고서를 작성한다. 외부감사보고서 역시 금감원과 투신협회에 공시한다. 가입 영업점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⑥펀드간 운용실적 비교공시〓투신협회는 이밖에 모든 펀드의 운용실적을 회사별, 펀드별로 비교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띄우도록 돼있다.

⑦장부서류 열람 요구권〓가장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가입자의 권리. 가입펀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적극적으로 유가증권 매매거래 내역서 등 장부를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회사측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열람 또는 복사를 허용해야 한다. 예컨대 러시아채권 또는 대우채권 편입 등을 따질 때의 근거.

금감원 자산운용감독국 김은집책임은 “이같은 수익자의 권리는 고객의 권익보호 뿐 아니라, 길게 볼 때는 투신업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챙겨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정경준기자>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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