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주성/獨 스타디움 손기정 국적 바로잡자

  • 입력 2000년 8월 14일 18시 52분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리 민족의 자랑인 손기정 선수는 나라 잃은 슬픔을 딛고 마라톤에서 우승함으로써 민족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쳤다. 지금도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서 있는 승리자 기념비에는 SON 이란 금박 글씨가 찬란하게 박혀 있다.

그러나 이름 옆의 국적은 ‘KOREA’가 아니라 ‘JAPAN’으로 돼 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해 현해탄 너머로 쫓겨가고 우리 민족이 주권을 되찾은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잘못된 국적이 아직까지 그대로 새겨져 있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함은 물론 후손으로서 얼굴도 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그동안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 8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나는 당시 서독의 병원들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한 박영록 신민당 의원을 돕게 됐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해왔다. 8월 15일 밤 11시경 박의원이 머무르고 있던 캠핀스키호텔에 도착해 보니 그는 방에서 시멘트와 모래, 물을 배합해 굳는 강도를 시험하고 있었다.

박의원과 그의 부인, 그리고 나는 16일 오전 0시 15분경 현장인 올림픽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박의원의 부인은 끌 망치 미장칼 걸레 시멘트 물 등이 든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전등이 켜져 있는 경비초소가 있었다. 인근 공사장의 사다리를 이용해 기념비에 접근한 우리는 끌과 망치로 대리석판의 글자를 쪼고 뽑고 갈아끼웠다. ‘JAPAN’이란 표기를 ‘KOREA’로 바꾸는데는 5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동이 틀 무렵 작업이 끝났을 때는 아무도 손 본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깨끗하게 마무리됐다.

우리는 캠핀스키호텔에 돌아와 독일의 대표적인 뉴스통신사인 DPA통신 기자를 불러 우리가 한 일을 말하고 국적이 다시 JAPAN’으로 수정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사건은 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나는 박의원의 지시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와 스위스 로잔에 있는 올림픽조직위원회(IOC)에도 편지로 이같은 내용을 알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뒤 ‘KOREA’는 ‘JAPAN’으로 다시 환원되고 말았다.

국적 정정은 단순하게 하나의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는 차원을 넘어선다. 제국주의 열강이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고, 지난날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마땅히 이뤄져야 한다. 인류의 박애와 정의를 주장하는 강국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어엿한 주권국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세계 무대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역사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힘이 부족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주기를 바란다.

이주성(성신여대 정보산업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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