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황병근/월북자 가족의 비극

  • 입력 2000년 8월 13일 14시 53분


일제시대 부유하게 살았던 우리 집안에는 일본 유학생이 많았다. 그런데 식민지 치하의 젊은 지식인들 중에는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예가이신 아버님(석전 황욱·石田 黃旭)은 3남 1녀를 두셨는데 이중 내 위로 두 분 형님이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들었다.

큰 형님은 남로당 전주시당위원장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지리산에서 마지막까지 투쟁하다 지리산 빨치산이 궤멸된 뒤 은신 중 복부 관통상을 입고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버님은 이승만대통령에게 장남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이대통령은 아버님의 글씨와 편지 내용에 감복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큰 형님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주었다. 큰 형님은 20년 형을 살고 나온 뒤 암으로 세상을 떴다.

둘째 형님은 전북일보 수습기자로 일하다 의용군으로 나가 월북했다. 지금은 연좌제가 폐지돼 월북자 가족이라도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지만 연좌제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정보과 형사들이 가끔 찾아와도 형님은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집안에 월북자가 많아 공직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80년대 초 연좌제가 폐지되면서 공직인 전북도립국악원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

사상의 지향에 따라 북으로 간 둘째 형님은 40여년 전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다 는 편지를 보내왔다. 당시 분위기로는 답장을 보낼 수도 없었다. 이런 편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큰 일 날 것으로 생각해 편지를 불태우고 쉬쉬하며 지냈다.

아버님은 둘째 아들을 늘 그리워해 보고 싶어 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93년 향년 96세에 세상을 떴다. 아버님은 백수단심지재통일(白首丹心只在統一) 민개상담조국통일(民皆嘗膽祖國統一) 이라는 글귀를 즐겨 썼다. 늙은 목숨 일편단심은 조국 통일에 있고, 국민은 와신상담해 조국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뜻이다.

90년대 초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회장이 방북할 때 아버님에게서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의 편액 글씨를 받아갔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에 돈도암에서 수도하며 글씨를 공부했다. 내금강이 개방되면 아버님이 쓴 편액이 돈도암에 걸려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대우그룹을 통해 둘째 형이 함경북도 화성군 입석리에서 연금을 받고 생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한을 찾아올 북한의 이산가족 명단이 발표기 전에 나는 혹시 형님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흥분돼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들어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낙담을 달랠 길이 없었다. 71세 노인이니 세상을 뜨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자 상봉의 한을 안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소에 둘째 형님이 찾아오시는 날 아버님은 비로소 영면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산가족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한 번에 100명씩 오고가는 사업을 여유있게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하루 빨리 면회소가 설치되고 방북단과 방남단의 숫자가 크게 늘어날 것을 기대할 뿐이다.

황병근(우리문화진흥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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