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 시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의 중앙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 수만 명이 정부의 부정부패와 경제 실정에 항의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다음 날 로센 젤야즈코프 불가리아 총리는 “시민들의 뜻은 존중돼야 한다”며 사임의사를 밝혔다. 소피아=AP 뉴시스
동유럽 불가리아에서 ‘젠지(Z세대·1995∼2010년 출생자)’가 주도한 반(反)정부 시위로 로센 젤야즈코프 총리가 11일(현지 시간) 전격 사퇴했다. 올 8월 아시아 네팔에서 시작된 반정부 젠지 시위 물결로 네팔은 물론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정권이 전복된 데 이어 동유럽으로도 젠지 시위대의 위력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젤야즈코프 총리는 이날 야권이 제출한 정부 불신임안 의회 표결 직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연령과 민족·종교의 사람들이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며 “시민들의 뜻은 존중돼야 한다”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사임의 직접적인 계기는 10일 전국적으로 이뤄진 대규모 시위였다. 현지 언론은 수도 소피아를 비롯한 전국 수십여 곳에서 1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했다. 불가리아 시민들은 정부가 제출한 2026년 예산안이 부패를 심화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지난달 말부터 항의 시위를 벌였다. 결국 정부가 이달 초 예산안을 철회했지만 시위는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더욱 확산했다.
특히 이번 시위는 만연한 부정부패와 이를 근절하는 데 실패한 기득권층에 분노한 청년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선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시위에 참여하세요’라는 밈(meme, 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확산했고, 인플루언서와 배우도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시위대는 ‘Z세대가 온다’ ‘Z세대 vs 부패’라는 팻말을 들고 행진하며 의사당 앞에서 정치인들을 조롱하는 영상을 반복 재생했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는 “불가리아 젠지는 1989년 공산주의 종식이나 1990년대 경제위기에 대한 직접 기억이 없는 첫 세대”라며 “이들이 정부에 전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당신들은 잘못된 세대를 건드렸다’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불가리아는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서 지난해 기준 유럽연합(EU) 27개국 중 헝가리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할 만큼 부패 문화를 척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번 사태로 지난 4년간 총선을 7번 치를 만큼 불안정한 불가리아의 정치는 또 한번 위기를 맞았다. 로이터통신은 9개 정당으로 분열된 의회에서 연정 구성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 경우 지난해 10월에 이어 또 조기 총선이 진행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WSJ은 루멘 라데프 불가리아 대통령이 이번 사태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친(親)EU 성향의 내각과 달리 서방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비판해왔다. 라데프 대통령은 자신의 정당을 창당해 차기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점쳐진다. 친러시아 성향의 그가 차기 총선에 출마해 당선될 경우 유럽 정치 지형에도 파장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