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문화 이미지

  • 입력 2000년 7월 9일 18시 21분


미술사 입문서로 정평이 나있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영어제목이 ‘The Story of Art’, 즉 ‘미술 이야기’이다. 이 책은 동양미술을 배제한 채 서양미술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인 곰브리치는 제목에서 서양이라는 말을 빼놓아 마치 세계 미술사 전체를 집필한 것처럼 내세우고 있다. 국내 번역서에 ‘서양’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것은 번역자들이 편의상 붙여 놓은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아도 서양인이 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대표적인 고정 관념을 보여준다. 문화를 그들의 전유물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서양인에게 동양 미술은 세계 미술사를 서술할 때 따로 언급할 가치가 없거나, ‘언급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미미한 존재라는 뜻이 된다. 이런 서양인의 편견은 문화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물론 서양인이 그동안 세계사를 주도해 온 탓이지만 그래도 동양인들이 억울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문화적 푸대접을 받아 온 동양에서도 한국은 더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외국 박물관에 가도 중국이나 일본 전시실은 있어도 한국 전시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외국 시인은 한국을 ‘은둔의 나라’라고 했다던가. 이것을 곧이곧대로 ‘칭찬’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이같은 ‘은둔’의 이미지는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우리에게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내한한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은 세계 무대에 내세울 만한 강렬한 문화적 이미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문화는 경제 교류에 큰 영향을 미친다. 패션 산업의 중심지 이탈리아의 옷이 똑같은 재료로 만든 한국제 옷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은 결국 문화 이미지의 차이 때문이다. 기 소르망의 언급은 선진국 진입 문턱에서 연이은 좌절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무척 뼈아픈 지적이다. 그는 우리처럼 문화적 뒷받침이 없는 경제 성장이 한계가 있음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어설픈 ‘외국 흉내내기’가 아니라 우리 문화를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 인정받을 만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닌가 싶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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