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배인준/부총리 자리가 어른거려?

  • 입력 2000년 5월 18일 19시 29분


부총리 자리가 어른거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998년 2월 취임 며칠 전에 청와대 수석비서관 내정자들에게 말했다. “국사는 국무회의에서 다룬다. 비서관의 역할은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정직한 정보를 제공하고 대통령과 부처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연락기능을 하는 것이다.”

재정경제부는 16일 이헌재(李憲宰)장관이 김대통령과 독대(獨對)한 사실을 기자들에게 부지런히 홍보했다. 대통령이 내각 경제팀장을 수시로 불러 현안에 대해 소상히 듣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 같은데 독대 자체가 중요한 사건처럼 부각되는 이유는 뭔가.

이장관이 김대통령과 독대한 것은 한 달 만이다. 이달초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 참석하기 전 독대를 희망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사를 앞두고 있다지만 ‘경제대통령’이 경제팀 업무를 열심히 챙기지 않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기호(李起浩)경제수석이 이장관을 따돌린다는 소문이 맞는 건가.

김대통령이 말한 비서관 역할 중 ‘대통령과 부처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연락기능’이란 뭘까. 장관이 부처업무에 대해 대통령과 신속하게 상의하도록 적극 도와주는 일인지, 아니면 장관을 제치고 현안들을 직접 챙겨 대통령과 ‘직거래’하면서 정책운용을 주도하는 쪽인지?

현 정부 들어 첫 재경부장관이었던 이규성(李揆成)씨는 이름에 흠집을 내지 않고 명예퇴임한 사람이다. 하지만 당시 경제팀에서는 강봉균(康奉均)경제수석의 튀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김대통령이 “경제팀의 중심은 이장관”이라고 한두 번 말하긴 했지만 정책결정력의 구도가 바뀌지는 않았다.

이규성씨의 뒤를 이어 재경부장관이 된 강봉균씨는 자신의 경제수석 후임자인 이기호씨의 견제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은 것 같다. 작년 5월 강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경제운용의 큰 그림은 청와대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DJ노믹스의 ‘적자(嫡子)’임을 확인 받아 후임 경제수석의 월권을 차단하려는 선제공격적 발언이었을까.

김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재경부장관을 부총리로 만들어 경제정책 조정기능을 강화시키겠다”고 밝히고 강장관 후임에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을 앉혔다. 일견 이장관을 경제부총리로 점찍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경제장관 측근에서 “이헌재밖에 없다고 누가 그럽디까”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총선이 끝나고 정부조직 재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이기호수석이 튀는 일이 늘어났다. 또 다른 경제부처 수장은 사석에서 ‘이헌재 금융개혁의 실패사례’를 ‘은근히 그러나 힘주어’ 지적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장관은 요즈음 공적자금 운용실태(失態) 등에 대해 언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이장관측은 “그러잖아도 사방에서 흔들어대는데 신문들까지 덩달아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진다. 이장관이 일종의 파워게임에 휘말렸다는 게 역시 사실인가.

진념(陳稔)기획예산처장관도 아무 생각없이 지내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밖에 객관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자신도 부총리감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경제팀 안에 더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장관에 대한 공격수는 경제팀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민주당과 지금은 재야에 있는 인사 중에도 경제부총리 ‘김칫국’을 마시는 인물들이 있어 보인다. 사정이 이러니 능력이 출중하다고 한동안 각광받았던 이장관도 힘이 빠질 법하다.

현정부 들어 ‘DJ이코노미스트’ 몇 명이 정부에 기용됐다가 도태돼 ‘책상물림의 관료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학자 중에도 부총리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하지만 다수 국민의 진짜 관심사는 누군가의 관운이 아니라 나라 경제의 운명이다.

부총리 자리가 눈에 어른거려 경제팀 안팎에서 물고 물리는 신경전을 계속하는 한 정책의 혼선과 표류를 막기 어렵다. 경제관료들의 눈치보기와 줄서기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목수가 많으면 기둥이 기울어진다. 뭔가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조직 개편후의 경제부총리 선택은 여간 중요하지 않다. 최적임 선택에 실패한다면 경제난제들이 더욱 꼬이게 돼 김대통령 자신이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고통에 빠질 우려가 있다. 막중한 인사권은 곧 막중한 인사책임을 뜻한다.

<배인준 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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