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깜깜이 선거'

  • 입력 2000년 4월 11일 19시 51분


내일이 선거일이다. 과연 누구를 찍어야 할 것인가. 나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리고 판단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기분이 몹시 나빠진다. ‘깜깜이 투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시내의 신문사나 방송국을 오가는 일을 제외하면 종일토록 고층 아파트 꼭대기층 거실 귀퉁이 책상 앞에 붙어 지내다 보니,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의 선거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후보자 등록일 이전에는 그나마 언론기관에서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응답률이 절반에도 못 미치고 그나마 설문에 응한 사람들마저도 절반이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한 여론조사였지만, 그래도 유력 정당의 두 후보가 20% 수준의 지지를 얻어 선두를 다투고 있다는 포괄적인 정보라도 얻을 수 있었다.

▼여론동향 파악하기 힘들어▼

그런데 선거운동 기간의 여론조사 결과 공개를 금지하는 선거법 때문에 그런 정보가 정말 필요한 지금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합동유세장의 박수부대 동원능력이나 출근길 병목구간에 늘어선 운동원의 수를 보면 어느 후보가 강세인지 어림짐작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웃과의 교류나 대화 기회가 별로 없는 도시 생활의 특성상 시중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해가 진 다음에야 돌아오는 직장인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처지일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표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기 어려운 것은 선거 판세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선거공보에 담긴 후보자 정보만을 보고 판단할 때 내 마음에 꼭 드는 후보는 작은 신생정당에 소속된 젊은 신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젊은 후보가 당선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먼 미래를 보고 사람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표를 주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매우 싫어하는 정당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정당이 제1당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전국적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고, 또 내가 다른 정당의 유력 후보를 밀어 그 정당 후보를 낙선시킬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낙선이 확실한 신생정당 후보 대신 내가 싫어하는 정당 후보를 낙선시킬 수 있는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질 용의가 있다. 나는 유권자로서 이러한 ‘전략적 투표’를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우선 어느 정당이 제1당이 될 것인지를 알 수 없고, 내가 사는 선거구에서 누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니 ‘깜깜이 선거’라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 언론기관, 여론조사를 직접 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정당과 후보자들이다. 특히 주요 정당들은 여론조사를 통해서 전국 선거구의 판세를 정확하게 들여다보면서 때로는 어렵다고 엄살을 떨고 때로는 압승을 장담하며 허세를 부린다. 압도적 우세지역과 열세지역은 후보자에게 맡기고 중앙당은 경합지역에 돈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쏟아 넣는다. 그들이 이러한 전략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려면 유권자는 아무 것도 몰라야 한다. 정말로 고약한 ‘정보 불균형’이다.

▼선거기간 여론조사도 공개해야▼

유권자가 그저 제일 좋아하는 후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선거판도를 읽으면서 차선의 결과를 선택하는 전략적 투표를 하고, 그래서 선거결과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것을 불합리하다고 할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다. 서로 다른 정치적 취향을 가진 유권자들의 집단적 의사결정에 관한 한 완전히 합리적인 제도는 없다. 이것은 벌써 수십 년 전에 이론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야 정당들은 자기네는 빤히 아는 선거 판세를 유권자들은 모르는 채 투표소에 들어가도록 선거법을 만들어 놓았다. 도대체 유권자를 뭘로 아는 것인가.

여론조사를 허용한다면 결과의 공개도 허용해야 옳다. 조작된 여론조사의 정치적 남용에 대한 걱정은 접어도 된다. 한두 번만 그렇게 선거를 치러보면 믿을 수 있는 여론조사 기관과 그렇지 않은 기관은 금방 가려진다. 유권자를 조작과 통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깜깜이 선거’는 이번으로 끝내야 한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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