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일철/北 개방의 길로 가려나

  • 입력 2000년 3월 24일 19시 33분


불가사의의 북한에서 항용 쓰는 용어를 독해하기가 힘들 때가 많다. 폭력배 사회의 은어가 일반사람들에게는 알아듣기 힘든 것처럼 북한의 체제 옹호용 은유 표현은 대개 다의적(多義的)인 메타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나름의 치밀한 논리가 있다.

1990년 사회주의 붕괴 후 김일성부자 체제 고수의 통치 메타포는 그 하나가 ‘우리식’이고 다른 하나는 ‘황색바람’인데 그 황풍 막기의 모기장을 튼튼히 치자는 것이다.

대개 정치적 용어는 그 말이 무엇의 반대말인가를 분석하면 본색이 잘 드러난다. 대개 김정일이 ‘총노선’ 담화에서 내세운 1990년대 ‘우리식’ 사회주의는 북한 고유의 사회주의가 가진 것을 고수하자는 앞 간판보다는 덩샤오핑의 중국식 개혁개방의 ‘풍’ 을 막겠다는 것이 그 본뜻이다.

김정일체제의 대외정책에서 가장 미묘한 상대는 역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국이고, 그에 대한 방벽을 쌓으면서 명시적 비판은 극력 삼가야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특히 지난 10년간에도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명시적 비판은 단 한번도 한 바 없고 계속 묵시적 메타포로 일관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북한의 최대 고민은 미국이나 러시아, 동유럽에서 불어오는 자본주의의 부르주아 생활양식이 아니라 바로 이웃 중국제 상품이 북한의 350개 이상의 장마당에 범람하는 것이다.

지난해 4월 김정일 총서기는 장마당 폐쇄령을 내렸다고 베이징(北京)발로 일본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94년이래 배급제가 붕괴된 북한에서 장마당은 북한 서민들의 생필품의 70, 80%를 거래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자는 장마당 폐쇄령과 엄한 단속을 강화했다. 일본 주간지 ‘아에라’(3월 20일)에는 청진시 비디오 촬영밀행취재기가 실렸다. 이 기사는 장마당 단속 이유가 ‘품질 좋은 중국 제품이 북한에 범람하게 되면 중국식으로 개혁 개방하는 편이 낫다는 사상이 퍼진다’는 ‘황풍’ 에 대한 북한 당국의 우려라는 것이다.

북한 언론매체가 한사코 막아야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생활양식, 또는 자본주의의 ‘황색바람’인데 이는 중국풍인 것이 분명해졌다.

왜 하필 ‘황색바람’ 인가. 만일 미국식 자본주의의 침투를 지칭한다면 ‘백색인종’의 ‘백색바람’일 터이다. 북한 통치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이다. ‘황색바람’이라고 한 것은 황허가 있는 중국, 황색을 선호하는 중국의 주색감, 황사 현상의 황색이었다. 그런데 이 ‘황색바람’을 모기장을 쳐서 막는다는 북한식 메타포는 개혁개방을 모기에 의한 감염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제도나 자유의 다원주의는 미국이 ‘병원체’이지만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중국이라는 모기의 역할이다. 중국풍의 방풍이 ‘모기장 치기’가 됐다고 독해할 수 있다. 사실 모기장은 바람막이가 아니라 모기막이이다.

그런 관점에서 2000년 신춘의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발전은 주목될 만하다. 우선 새해에 북한은 ‘황색바람’막기의 모기장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후 미국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발휘해달라고 강력히 주문했다. 그 때 중국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북한 사람들을 너무 잘 안다. 우선 북한 지도부가 온갖 시행착오를 해볼 대로 다해보고 마지막으로 도움을 자청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는데 중국 대북외교의 지혜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중국이 아무런 충고나 요청도 안하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고 마지막으로 그쪽에서 제발로 찾아온 기회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온 셈이다. 이것이 중화주의적 중국식 외교의 지혜인가싶다.

신일철(고려대 명예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