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이제는 仁濟?

  • 입력 2000년 3월 20일 19시 32분


총선을 코앞에 둔 요즘 정치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인물은 이인제(李仁濟)씨인 듯 싶다. 누구는 용케 공천은 받았지만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대상에 오를 것이 뻔해 속을 끓이고, 누구는 이 돈 저 돈 끌어모아 쏟아 부어도 좀처럼 지지도가 오르지 않아 안달이고, 또 누구는 병역비리 수사로 다된 밥에 코 빠뜨리지 않을까 애가 타는 판이지만 집권 여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인 이씨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적어도 그런 걱정은 없어 보인다. 3년 후 대권에 도전하려는 마당에 의원 배지 다는 일을 염려하랴, 그 속까지야 들여다볼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씨의 자신만만한 듯한 모습은 그래 보인다.

▼‘대권 행보’의 계산법▼

이씨는 자신의 고향이자 총선 출마 지역구인 충남 논산-금산을 찾은 자리에서 “국회의원보다는 더 큰 꿈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또 김종필(金鍾泌·JP)자민련명예총재를 ‘지는 해’에 비유했다. 이제 JP의 시대는 끝났으며 ‘충청의 주자’는 ‘떠오르는 태양’인 자신이 돼야 한다는 거였다. 이에 대한 자민련 측의 반응은 “이인제는 천방지축 엉덩이에 뿔이 난 망아지”란 듣기 민망한 소리였지만 이번에는 민주당의 고문과 대변인이 “3년 후 젊은 지도자의 시대가 열리면 이인제 후보가 맨 앞에 서 있을 것”이라고 거들고 나섰다. 이씨는 “이인제와 함께 내일의 태양을 만들자”고 기염을 토했다. 그에게는 어느새 ‘충청의 희망, 한국의 미래’라는 ‘상표’가 붙었으며 그의 지구당대회는 언뜻 대통령선거 출정식 같았다고 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그의 후원회에서는 ‘동교동계 권력실세’로 불리는 권노갑(權魯甲)민주당고문까지 그를 ‘차기 지도자감’으로 추켜세웠다.

이쯤 되면 집권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는 거의 결정된 듯이 보인다.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 변수가 많다. 우선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이씨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다. 승리하면 날개를 달 수 있겠지만 패하면 추락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그가 보이고 있는 ‘대권 행보’는 총선전략이자 권력 중심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양해 사항’이기 때문이다. 권력 중심에서는 어차피 자민련과의 합당이 물 건너갔고 JP가 등을 돌린 이상 ‘충청권 정면 돌파’는 피하기 어렵게 됐으며, 상황이 그런 만큼 직접 상대하기 껄끄러운 JP를 제어하는 데는 ‘이인제 카드’가 최상이라는 계산을 했을 법하다. 이씨로서는 ‘JP의 대항마’로서 한층 몸값을 올리고 나아가 새로운 ‘충청의 맹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다. 이를 발판으로 ‘정권재창출의 대안(代案)’이 될 수도 있다.

▼‘떠오르는 태양’ 외쳐서야▼

그러나 권력 이해에 따른 ‘무동타기’에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가 진정 홀로서기에 성공하려면 국민에게 보다 확고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젊은 일꾼’으로서 듬직한 신뢰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87년 ‘YS맨’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아버지’였다. 그는 YS가 말한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가 이인제라는 풍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일약 ‘거물급’으로 떠올랐다. 정치 입문 10년만인 97년 그는 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경선에서 이회창(李會昌)후보에게 패배한 그는 당초의 거듭된 약속을 어기고 경선 결과에 불복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룰을 깬 것이다. 그는 그 이유로 ‘사정변경의 사유’를 들었다. 아들 병역문제로 이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경선 파괴 비난에 대해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씨가 ‘차기 지도자’로 자임한다면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태도다. 정치와 권력의 세계에는 언제든 ‘사정변경의 사유’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눈앞의 이해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면 지도자는커녕 제대로 된 정치인이 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씨는 이제 대권만을 좇는 ‘야심가’의 면모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떠오르는 태양’을 외친다고 ‘태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쳇말로 ‘오버’해선 안된다.

<전진우기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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