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호근/지역감정에 또 속을텐가

  • 입력 2000년 3월 6일 19시 29분


총선을 한달 여 앞두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설전(舌戰)이 벌어지고 있다. 여야가 폐기처분돼야 마땅할 그 끈적이풀 같은 감정덩어리를 노골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 삿대질하듯 지역감정 발언을 퍼붓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롭고 부끄럽고 걱정스럽다.

발단이 된 3·1절 경축사는 대통령으로서 의당 할 수 있는 우려의 표현이었는데 5·16과 군부통치를 지역주의의 시발점으로 지목한 것이 화근이었다. JP는 ‘내고장 대통령론’을 들고 나왔던 71년 대선이야말로 지역주의의 원조라고 되받았다.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의 이회창총재는 87년 대선 당시 ‘4자 필승론’을 호소하던 사람이 지역주의의 확산에 일차적 책임을 져야한다고 못박았다. 신생정당 민국당은 한술 더 떠 영남의 소외정서를 부추겼다. TK의 대부격인 김윤환의원은 “TK와 PK가 협력해 영남정권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고, 김광일 전의원은 부산의 자존심을 상기시키면서 “신당이 실패하면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죽자”고 결의를 다졌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럴까.

그러나 국민은 곤혹스럽다. 지역감정의 해소책을 제시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있으니.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21세기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케케묵은 악습을 애써 환기시켜 어떤 이득을 보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공천후유증으로 이합집산하는 정치권을 조소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이 때 국민정서의 최저층에 저장된 원색적 감정을 자극해서라도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는 것인가. 총선 쟁점이 부각되기도 전에 지역주의로 오염될까 두렵다.

60년대에 슬며시 고개를 든 지역주의는 정치적 폭력과 억압을 토양으로 번성해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군림하게끔 되었다. 그것은 정권연장의 도구였으며 동시에 정권교체의 명분이기도 하였다. 60년대 여촌야도(與村野都) 투표행태가 지역주의로 대체되면서 급기야는 기업과 사회단체의 조직원리로 파급됐다.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할 것 없이 이익점유를 향한 집합행동의 원리로 지역주의와 지역연고를 스스럼없이 택했다. 네트워크의 연결고리로, 억눌림의 한풀이 수단으로 이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정치권이 지역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지역주의는 최대의 득표전략이었으며 그것을 단순히 뒤집어놓은 반지역주의는 집권당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선전용 문구였다. 지역분할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당들끼리 서로 못났다고 비난하는 작태는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웃지못할 풍경일 것이다.

정치선진국인 유럽에도 지역주의는 존재한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정당들도 특정 지역을 표밭으로 삼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과 같은 원색적인 지역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지역감정이 종교 인종 문화적 메커니즘으로 흡수되거나 정책대결의 공간에서 희석되기 때문이다. 독일 북부와 중서부에서 강세를 보이는 사민당과 서남부에 거점을 둔 기민당이 지역감정으로 격돌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유산을 폐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정치인들에게 정신차리라는 비난은 이제 효력을 상실한 것 같으므로 다른 탈출구를 찾아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가능한 방법은 세 가지 정도.

첫째, 이탈리아처럼 군소정당이 10여개 정도 할거해 지역간 정치동맹이 결성되면 지역주의가 희석된다. 그래서 같은 지역 내에서도 정당이 여럿 출현하기를 기다리는 것. 둘째, 젊은 층의 대거 영입을 통하여 선거 쟁점을 지역전에서 세대전으로 전환하는 것. 셋째 원론적인 얘기지만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후보를 절대 찍지 않는 것.

첫째 방법은 정치적 불안정의 우려가 많고, 둘째는 공천과정에서 이미 물건너 갔기에, 남아 있는 선택은 원론적인 방법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략임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투표혁명이기 때문에. 정책대결이 없는 이번 총선의 최대 관심사는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후보를 추방하는 일이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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