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21세기 도전]경제주역이 바뀐다

  • 입력 2000년 1월 31일 20시 01분


최근 한 일본 신문에 ‘일본 증시에 9000번 시대가 왔다’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9000번’이란 정보통신 방송 서비스업종이 포함된 도쿄(東京)증시 업종코드. 제조업이 아니라 NTT도코모 소프트방크 등 정보통신업종이 일본증시를 좌우하는 새로운 흐름이라고 소개한 내용이었다.

산업화시대 쇠퇴와 정보화시대의 도래로 일본경제의 주역도 바뀌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만을 무기로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속출하고 있다. “내 본적은 인터넷 내부에 있다”고 말하는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 마사요시)소프트방크 사장이 총리자문기관인 산업경쟁력회의 위원에 위촉된 것은 몇 년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본 정보화의 선두주자 손정의는 시사월간지 주오코론(中央公論) 1월호가 일본기업 중견간부를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주목하는 기업인’ 1위에 올랐다. 손정의는 이미 야후를 비롯해 접속건수가 세계 10위안에 드는 인터넷 포털(관문)서비스회사 3곳을 장악했다. 그는 올들어서도 중국 인터넷시장 진출과 ‘인터넷 벤처기업 연합’ 구상 등 ‘인터넷 제국’ 건설을 위한 사업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출자기업의 주가폭등으로 개인재산은 380억달러(약 41조원)로 일본은 물론 아시아 1위. 소프트방크 시가총액은 10조엔(약 110조원)을 돌파해 일본 5위가 됐다. 올해 43세인 그는 일본 사가(佐賀)현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3세로 한국식 성을 지키고 있다. 고교1학년 때 미국유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분교를 졸업했고 24세 때인 81년 소프트방크를 설립했다.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30대’로 불리는 히카리통신 시게다 야스미쓰(重田康光)사장. 올해 35세에 불과하지만 미국 경제월간지 포브스 1월호에 ‘세계에서 가장 빨리 돈을 번 사람’으로 소개됐다. 주가폭등으로 현재 개인재산이 약 300억달러로 아시아 2위의 억만장자다.

그는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끈 휴대전화 등 이동전화 유통업으로 사세를 급신장시킨 뒤 최근 인터넷과 휴대단말기를 결합하는 사업 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작년 9월 도쿄증시에 상장된 히카리통신 주가는 상장 2개월만에 공모가의 3배이상 폭등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23세때인 88년 자본금 100만엔으로 회사를 세웠다. 입사 2,3년차의 유능한 젊은 직원을 임원으로 발탁하고 일본기업중 처음으로 대리점 경영자에게도 스톡옵션을 주는 등 파격적 경영을 해왔다.

정보기술(IT)과 기업전략을 결합한 경영컨설팅으로 주목받는 퓨처시스템컨설팅 가네마루 야스후미(金丸恭文·46)사장은 일본열도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작년 6월 장외등록시장에 기업을 공개할 때 액면가 5만엔인 주식이 공개첫날 주당 3350만엔을 기록했다. 액면가의 670배, 공모가의 5.2배로 공개첫날 주가가 공모가의 5배를 넘은 첫 일본기업이 됐다. 4년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회장의 기업매수제의를 “당신 제안을 받아들일만큼 한가하지 않다”며 일축한 것은 유명하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중에는 오쿠다 히로시(奧田碩·67)도요타자동차회장과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63)소니사장을 눈여겨볼만 하다. 두 사람은 주오코론 조사에서 손정의에 이어 ‘주목받는 기업인’ 2위와 3위에 올랐다. 또 작년말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가 세계 75개국 경영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경영자’ 조사에서도 각각 7,8위를 차지했다.

일본경영자단체연합회장인 오쿠다는 환경기술과 접목된 차세대 차량개발 등 경영개혁을 추진해 왔다.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가 만능이라는 통념을 비판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승자에게 정당한 보수가 돌아가는 만큼 패자부활도 가능한 사회가 이상적”이라는 그의 주장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영향력이 가장 큰 기업인에게 주는 ‘재계인 상(賞)’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데이는 제조업과 정보기술결합에 관심이 높다. 유망업종 진출과 쇠퇴업종 철수, 의사결정 하부이양 등을 부작용없이 성공시켰다. 지난해 제시한 ‘21세기 경제의 다섯가지 키워드’, 즉 △디지털경제 △주식시가총액주의 △수확폭발의 법칙 △규칙파괴자 △가치창조경영 개념은 일본재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 GM의 사외이사에 취임하는 등 해외에서도 지명도가 높다.

프랑스 르노자동차 수석부사장 출신인 닛산자동차 최고집행책임자 카를로스 공(47)은 외국인이지만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받는다. 닛산 경영정상화를 위해 일본에 파견된 그는 작년 10월 주력공장 폐쇄와 대규모 감원계획을 포함한 파격적인 경영재건대책을 내놓아 일본사회를 경악시켰다. 외국기업의 일본기업 매수가 늘어나는 상황과도 맞물려 그의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일본 안팎의 관심거리다.

<도쿄〓권순활특파원>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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