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린 옐친시대]러TV 벌써부터 푸틴 '용비어천가'

  • 입력 2000년 1월 3일 20시 12분


러시아 민영 NTV는 2일 저녁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이토기(종합)’를 블라디미르 푸틴(48) 대통령권한대행의 특집방송으로 꾸몄다. 방송은 푸틴의 학창시절 은사와 친구, 고향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옛 이웃주민 등의 증언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 푸틴’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NTV는 하루전에는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러시아 전국 3대 방송 가운데 유일하게 지난해 총선에서 반 (反)푸틴 대열에 섰던 NTV의 변모는 옐친 사임 이후 러시아의 엄청난 변화를 대변한다. 여론재단이 지난해 12월 28일 실시한 마지막 여론조사에 따르면 푸틴의 지지율은 49%로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수(13%)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9%)를 압도했다.

이토기의 진행자 예브게니 키실료프는 “푸틴이 유일한 옐친의 후계자이며 3월 26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는 푸틴을 선출하는 형식적인 행사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선까지 남은 3개월 동안 그래도 변수가 될 만한 것은 체첸전쟁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체첸전쟁은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며, 반군들이 과거처럼 테러로 맞선다면 러시아인들의 안정추구심리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푸틴에게 유리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총리 시절 푸틴 못지않은 높은 인기를 누렸던 프리마코프(71)는 푸틴의 급부상으로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푸틴은 시장개혁파이고 프리마코프는 중도좌파에 가깝지만 두 사람의 지지기반이 겹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이며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해 강한 지도력과 사회안정을 선호하는 유권자들이 주요 지지계층이다.

푸틴이 급부상하자 프리마코프 지지계층이 대부분 푸틴지지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프리마코프는 대선포기까지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령에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굳이 ‘대선 이후’까지 내다보며 망신을 무릅쓴 모험을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악명높은 비밀경찰 출신이라는 사실이 푸틴에겐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KGB 후신인 연방보안부(FSB) 창설 기념일인 지난해 12월 18일 모스크바 루뱐카 거리의 옛 KGB청사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푸틴은 “나는 지금 루뱐카에서 벨리돔(총리실)으로 파견나와 있다”는 농담을 하며 루뱐카가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강조했다.

루뱐카에는 KGB 출신으로 유일하게 구 소련 최고지도자에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의 흉상이 서 있다. 이 옆에 푸틴의 흉상이 나란히 놓이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주가노프(56) 역시 대세가 푸틴 쪽으로 기운데다 총선에서도 겨우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만족해야 했기 때문에 세불리를 절감하고 있다.

이 때문에 푸틴의 잠재적 경쟁자들은 권력분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푸틴은 크렘린의 주인이 되더라도 옐친이 지난 9년간 누렸던 카리스마는 이어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의회에서는 부통령제 신설과 대통령권한 제한, 지방정부에 대한 권한 이양 등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공산당은 지나치게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 약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때 대권을 노리던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64) 과 세르게이 스테파신 전총리(48) 등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푸틴이 옐친의 후계자가 될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그의 주변에는 인물들이 모이고 있다. 푸틴의 측근그룹은 크게 연합당 등 우파세력과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그 인맥, KGB인맥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총선에서 연합당을 이끈 세르게이 쇼이구 비상대책부장관(45)과 상트 페테르부르그 출신으로 푸틴과 절친한 스테파신 등이 주목받고 있다. 스테파신은 새 국가두마(하원) 의장으로 거명되고 있다.

우파연합의 공동대표인 세르게이 키리옌코 전 총리(38)와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41) 등도 푸틴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피’로 분류된다. 역시 개혁파인 그레고리 야블린스키는 대선 독자출마를 노리고 있지만 푸틴과 연대할 가능성이 크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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