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88)

  • 입력 1999년 8월 6일 19시 05분


나는 그가 펼쳐둔 책을 집어 들었는데 독일어 제목만 눈에 들어왔어요.

번역을 하는 중이오.

아르바이트 하는 거예요? 사무실료까지 일정 부분 배당을 해야겠네.

에에 그러니까…나는 지금 무보수로 노력동원된 인력이오.

제목이 뭐예요?

철학의 빈곤이란 책의 몇 챕터를 뽑고 있어요. 도이취 이데올로기에서도 간추려내고.

출판사 일이 아니시고?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주섬주섬 책과 원고를 그러모아 가방 속에다 쓸어 넣었습니다.

직업 활동가 양성소에서 쓸 교재요.

남의 일터에 와서 음모나 꾸미고 있으면 안돼요. 책 따위로 무슨 변화가 일어난담.

송영태는 두터운 안경을 벗어서 입김을 호옥 내불더니 남방 자락에다 대고 정성스럽게 문지르고나서 다시 고쳐 썼지요.

내가 잘 아는 문장 하나가 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에에 그러니까…인간은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서 이들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적 힘을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눈 속이 뜨거워졌지요. 갑자기 그때 당신 생각이 났을까요. 그래 그래,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편지라도 써야하는데. 나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게 누구의 책인가요?

마르크스라는 털보 아저씨의 책입니다. 이때는 그가 청년으로 불리던 시기였지만요. 우리도 여기서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나는 얼른 붉어진 눈을 감추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최루탄 때문에 언제나 학교에 갈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을 가리고도 눈두덩이 부어오를 정도로 울고 나오면서 그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처 같은 것이었는데, 역시 사람의 말은 위대해요. 물론 나는 그 딱딱한 번역투의 문장이 시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건 당신이 사용하던 말투였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것이 낡고 상투적인 표어처럼 내동댕이쳐진 먼 훗날에까지도, 이를테면 남의 목소리나 영화의 번역 자막을 통해서 볼 때라든가 창고 선술집에서 취한 유학생들의 인터내셔널 합창을 들었을 때 어쩐지 나팔이 달린 먼지 투성이의 옛날 축음기에서 흘러간 유행가를 들으며 가슴이 서늘해지던 것과도 같이. 베를린의 그날 밤 새벽에 나는 침묵하고 송은 탁자 위에 번진 생맥주의 흔적을 찍어 뭔가 끄적거리고 있었고 축제로 변한 카페에서는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지요. 모두 나중의 일이에요.

선생님….

하고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돌아다보니 진작에 나간 줄 알았던 그가 와서 응접실쪽에서 화실 안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게 좀 반갑기도 했죠.

이번엔 또 뭐예요?

뭐 별건 아니고, 오늘은 내가 모실려고 왔소.

근사한 데가 아니면 사양하겠어요.

나는 을씨년스럽게 어질러진 화실 안을 새삼스레 둘러보고나서 그를 따라 층계를 내려갔는데 길가에 진회색의 승용차가 서있더군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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