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85)

  • 입력 1999년 8월 3일 18시 40분


나는 그제서야 진심으로 미안해졌어요.

예 그러죠. 이리 앉으세요.

그는 내 말에 따르지 않고 화실 안을 서성대면서 이리 저리 돌아다녔어요. 마치 마지막 심사를 하는 사람처럼 학생들의 소묘들을 둘러보거나 책장에 놓인 작은 장식품들이며 손으로 빚어 구운 그릇이나 항아리에 꽂힌 마른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어요. 커피 잔을 의자 앞에 놓아 주고 내가 먼저 마시면서 그에게 말했어요.

무슨 좋은 일이라두 있나요?

예에?

이번에는 그가 내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나를 멍한 얼굴로 돌아다 보았어요. 그는 정말 천진스럽게 눈이 안보일 정도로 주름을 잡으며 웃었지요.

그러믄요, 아주 좋은 일이 있습니다.

송영태가 내 앞에 다가와 마주 앉으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이 학원의 수강생이 되기로 결심했죠.

그건 곤란한데요. 전 지금 입시생 위주로 받구 있거든요. 그것두 두 달 동안이에요.

특별 개인지도라든가 그런 건 없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어요. 수강료가 좀 비싸겠지만.

좋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그쪽에서 편하신 때부터 시작하기루 하죠. 매일 나올 필욘 없구요 일주일에 두번이 어떻겠어요?

바로 제 생각과 같습니다. 다음 주부터 시작하기루 하지요. 에에 그러니까….

하고 더듬더니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코 앞에다 대고 들여다보았어요.

수요일, 금요일이 좋겠군. 어떻습니까?

저녁 여섯 시 이후라면 저두 괜찮아요. 그런데 뭐하러 그림을 배우려고 하죠?

그는 마치 나의 그런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슴없이 대꾸하더군요.

에에 그러니까…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지려고 그럽니다. 사물의 표현에는 여러 가지 관점과 방법론이 필요할테니까요.

그건 훨씬 나중의 일이구요, 일단은 정확하게 보고 그대로 잡아내는 게 우선이지요.

그래도 사람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서루 다를걸요. 손짓두 다르구요. 헌데 이거 좀 출출하고 어딘가 섭섭하지 않습니까?

저는 진작에 저녁을 먹었어요.

아 그렇군요. 에에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오늘 사제의 인연을 맺은 셈이니까 제자가 스승에게 박주 한 잔 대접해드리고 싶은데요.

나도 소주 한 잔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어서 선선히 말했죠.

좋아요. 여긴 우리 동네니까 내가 잘 아는 집이 있어요.

그를 데리고 화실에서 길을 건너 시장통 입구로 갔습니다. 거기 일년 사철을 다른 데로 이사 가지 않고 저녁녘이면 나오는 포장마차로 갔어요. 부부가 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삐쩍 마르고 키가 작은 반면에 여자는 키도 크고 뚱뚱해서 그집을 드나드는 우리 학생들이 뚱뚱이와 홀쭉이네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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