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남성공화국」의 현주소

입력 1999-07-05 18:21수정 2009-09-2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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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장관’ 손숙씨의 사임은 ‘남성공화국’ 대한민국의 문화적 현주소를 다시금 확인해준 사건으로서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죄송스러운 말씀이나 역시 여성인 후임 김명자장관은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역대 여성장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질 시비에 시달리다가 ‘단명’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이 장관뿐만 아니라 총리나 대통령직까지도 맡아서 잘만 하는데, 올림픽 메달 따기로는 남자를 능가하는 한국 여성들이 유독 정치에서만큼은 맥을 못추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문제는 아무래도 남자 쪽에 있는 것 같다. 정치는 이론적으로 보면 남녀가 따로 없는 게임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득권을 확고히 장악한 남자들이 작심하고 ‘왕따’를 시킨다면 제 아무리 유능한 여자라도 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유한계급론’이라는 걸출한 저작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약탈적 본능을 숭상하는 ‘야만문화의 평화적 단계’로 규정한 미국 사회학자 토스타인 베블렌은 여성의 예속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약탈을 위한 전투에는 강건한 자들이 고용되며, 평범하고 일상적인 작업은 여자와 노약자들이 담당한다. 착취 능력의 결여는 경멸의 사유가 되며, 여성과 여성고용에 대한 금기는 이러한 경멸의 반영이었다. 그 결과 여자들과의 지나친 접촉을 불결하게 여기는 견해가 생겼고, 이것이 문화적으로 유지 존속됨으로써 지금도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면서 위엄과 권위를 행사하려는 여자들을 보면 우리는 불쾌감을 느낀다.”

무려 100여년 전에 ‘야만적 성차별’이라는 에세이에서 한 말인데, 새 천년을 코앞에 둔 지금도 한국 남자들은 그런 불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내각을 통틀어 딱 하나뿐인 여성장관을 그렇게까지 들볶을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대부분 남자인 정치부 기자들과 언론사 데스크의 ‘여성장관 때리기’ 단골메뉴는 전문성 부재, 행정경험 부족, 조직장악력 결여 등이다. 여기에다 돈문제나 땅문제 등 도덕성 시비를 곁들이면 여성장관의 사임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고 만다.

말이 난 김에 한번 물어나 보자. 제2기 내각에 ‘전문성’ 없는 장관이 어디 손숙씨뿐이던가.

행정경험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장관할 사람은 관료 출신밖에 더 있는가. 장관이 마음에 맞는 참모 한 사람 없이 혈혈단신 관료조직에 뛰어들게 만드는 인사제도 아래서 조직 장악 문제는 남녀를 불문하고 똑같이 부닥치는 난제가 아닌가. 기업인들에게서 격려금 2만달러를 받은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공식 판공비가 월 수백만 원에 불과한 다른 남성장관들이 술 사고 밥 사는 데 쓰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진지하게 추적해 보신 적이 있는가? 대통령과의 친소 관계에 따른 여성장관의 전격 발탁을 문제삼는데, 어디 남자들은 다 능력이 있어서 장관이 되었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와 언론은 아직 여성장관에 대해 비협조적인 것 같다”고 손숙씨는 하소연했지만,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냉소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어느 젊은 비평가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암탉이 울면 오페라하우스가 내려앉는다고 믿는 멍청한 수탉들이 영계나 밝히면서 살아가는 대한양계장”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고생문에 들어선 신임 ‘여성장관’에게 양심상 차마 축하는 못하겠고, 격려말씀이나 한 마디. “의연하게, 소신껏, 일 그 자체로 승부를 내시길.”

유시민(시사평론가)smrhyu@ms.kr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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