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여성특집]佛혁명 「女權신장」 깃발올려

  • 입력 1999년 5월 19일 10시 10분


《뉴욕타임스는 지난 16일 ‘밀레니엄 6부기획특집’중 두번째로 ‘지난 1천년 여성의 삶의 변화’를 게재했다. 이번 특집에서는 △여성의 지위 및 역할의 변화 △여성과 성(性)△지난 4세대간 중국여성의 신분변화 △미국여성의 직업분포 △모체(母體)의 역할변화 △여성지위의 장래 등을 다루고 있다. 본란에서는 이번 특집을 앞으로 4회에 걸쳐 소개한다. 뉴욕타임스는 4월18일 첫번째 특집으로 ‘지난 1천년의 최고’를 게재했으며 △6월6일‘모험의 역사 ’△9월19일 ‘예술의 역사’△10월17일‘내가 중심이 되는 시대’△12월 5일엔 마지막특집 ‘3000년에 전할 타임스캡슐’을 게재할 예정이다. 그동안 본란에 연재돼온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지난 천년의 최고’는 여성특집이 끝난후 계속된다.》

지금까지 역사는 주로 남성의 손에 의해 씌어졌다. 따라서 지난 천년간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들의 의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성들은 항상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으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남녀관계와 관련해서 중세에 가장 열띤 논쟁이 벌어졌던 주제는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10세기와 11세기경에는 대부분의 사제들이 결혼을 했고, 그 아내들은 일부 성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세기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면서 여성들이 성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막히고 말았다.

▼아내 재산 남편이 관리▼

교회는 또 1215년에 일부일처제를 신성한 것으로 정하고 이혼을 금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첩을 두는 생활을 버리지 않았고, 아내나 첩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을 함부로 내치는 관습도 여전했다. 일부일처제는 귀족가문들이 일부일처제를 유지해야 자신들의 재산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종교적 가르침과 세속적인 법에 의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였고, 아내의 재산도 남편의 관리하에 놓였다. 남편은 아내를 공정하게 다스리되 잔인한 짓을 해서는 안되었다. 아내를 가볍게 때리는 것은 괜찮았다. 그러나 개신교 목사들은 어떤 경우에도 아내를 때려서는 안된다고 설교했다.

아이를 혼자 기르는 여성들은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을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그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여성끼리 부부행세도▼

그러나 17세기와 18세기에는 여성들끼리 부부행세를 하며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두여성중 한사람이 남자옷을 입고 남자행세를 했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여성들도 역시 남장을 했다. 이때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는 것에는 반대했으나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생각은 거부하지 않았다. 17세기의 한 남성 여권론자는 남자가 진정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아내가 남편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정치적 행동은 주로 17세기에 생겨난 살롱에서의 대화나 궁정에서 이루어지는 아양섞인 대화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쇄술이 보급되고 여성들의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18세기가 되자 글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밝히는 여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하층계급 여성들은 거리의 폭동에 참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이처럼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던 여성들의 정치적 행동이 한데 결집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들은 거리낌없이 대중연설에 나섰고 군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던 남성 혁명가들은 여성이 집에서 훌륭한 시민들을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들어 여권운동이 가장 꽃을 피운 곳은 신대륙 미국이었다. 여성들은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했고 여성들만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기존의 대학들중에서도 여성들을 받아들이는 곳이 조금씩 생겨났다.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은 기부금을 내는 여성들의 강요에 따라 1894년에 여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문학교도 뒤늦게 개방▼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가까운 무렵까지도 전문 직업인을 길러내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운좋게 이런 학교를 졸업한 여성들도 남자 동급생들보다 지위가 낮은 직업에 종사했다. 1920년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된 데에도 사실은 흑인 남성과 이민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후 백인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인종차별적인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후 20세기가 진행되면서 서구여성들은 중세여성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자유와 권리를 조금씩 얻어냈고 원하는대로 교육받을 권리도 확보했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도 많다. 앞으로도 남자와 여자의 다른점, 우월성과 열등성, 남녀의 관계 등에 대한 논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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