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행들 「돈 굴리기」 비상…예대율 사상 최저

  • 입력 1999년 5월 16일 20시 37분


매주 한차례 열리는 H은행 임원회의의 단골주제는 우량 대출처확보방안. 은행장이 최근 대출실적을 일일이 챙기며 독려하지만 뾰족한 묘안이 없어 고심하다 회의를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 임원이 전했다.

이 임원은 “대출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수입원인데 믿고 돈 빌려줄 곳이 없어 고민”이라며 “요즘은 우량 고객에게 돈 많이 빌려주는 지점장이 일등공신 대접을 받는다”고 말했다.

신한 한미 하나 등 후발은행들이 3월부터 연 6∼7%대의 저금리를 무기로 우량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세일을 주도하자 최근 들어서는 산업 기업 등 국책은행까지 경쟁에 나섰다.

돈 굴릴 곳을 찾지 못한 은행들이 본점과 각 지점별로 전담팀까지 구성해 우량 대출처를 찾고 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다.

1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의 예대율(은행이 고객들로부터 받은 예금중 대출로 운용하는 자금의 비율)은 3월말 현재 69.6%에 그쳐 사상 처음 70% 밑으로 떨어졌다.

돈 가뭄이 극심했던 작년 1월 96.5%까지 치솟았던 은행권 예대율은 △6월 86.4% △9월 74.6%로 계속 낮아지고 있다.

예대율이 낮다는 것은 은행 금고에 돈은 넘치지만 실제로 이자를 물고 돈을 빌려쓰는 고객은 계속 줄어들고 있음을 뜻한다. 은행 입장에서는 ‘예대율 하락→이자수입 감소→수익성 악화’라는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를 감수해야 한다.

예대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최대 고객인 대기업의 자금 수요가 살아나지 않고 있는데다 주가 상승으로 기업들이 유상증자에 눈을 돌리면서 은행권 대출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

은행들은 신용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점을 들어 돈이 남아돌더라도 신용상태가 확실하지 않은 중소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신규대출은 극도로 꺼리고 있다.

조흥 한빛 제일 서울 외환 신한 등 6대 시중은행의 3월말 현재 가계대출 잔액 18조9천5백43억원중 2조3백67억원이 연체돼 연체율이 10.7%를 기록했다. 2월의 10.9%에 이어 여전히 높은 수준.

그러나 은행들이 너무 쉽게 ‘돈 장사’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상환 잠재력이 있는 신규 고객을 발굴하기보다는 신용도가 완전 검증된 소수의 우량 중소기업과 개인에게만 대출경쟁을 집중하는 은행권의 관행도 예대율을 떨어뜨린 요인이라는 지적.

한 은행관계자는 “뻔한 시장에서 경쟁하다보니 은행끼리 상대방 고객을 뺏고 뺏기는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고 있다”고 개탄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