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43)

  • 입력 1999년 2월 19일 18시 59분


읍내에 나가서 여러 가지 취사도구도 사오고 장을 보아와서 우리가 마주앉아 밥을 먹던 기억이 나는군요. 당신과 살로 친해지지 않고 어떻게 아버지의 얘기를 할 수가 있겠어요. 학생 때에 어느 친구가 해주던 말이 생각나요. 남자와 함부로 밥 같이 먹지마라 둘이서 밥 먹으면 정 생긴다구요. 우리 처음에 주인 집에서 밍크 담요 두 장 빌려다가 서로 양쪽 벽가에 멀찍이 떨어져서 자던 생각 안나요? 우리는 그렇게 등을 돌리고 누워서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얘기를 하곤 했죠. 그런 며칠 사이에 내가 아버지 얘길 꺼냈을 거예요.

내가 아직 국민학교 다녔을 적에 우린 서울에 살았는데 이사를 여러번 했어요. 엄마 혼자서 생활을 꾸려 나가야했기 때문에 집을 산 건 훨씬 커서의 일이지요. 그때는 정희도 어렸고 남동생들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 나는 엄마가 안계실 때에는 제법 엄마처럼 밥도 짓고 술에 취해 잠들었던 아버지를 깨워서 진지상도 차려 드리고 했어요. 그래서 이사 다니는 통에 학교를 여러군데 옮겼는데 어느 날인가 전학한 학교에 갔더니 담임 선생님이 교장실로 가보라고 했어요. 교장실에 가니까 낯선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죠.

네가 한윤희냐?

하더니 그 아저씨는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너희 아버지가 맞느냐고 해요. 그렇다구 했더니 집 주소를 아느냐구 그래서 모른다구 했지요.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 일렀어요.

가서책가방챙겨가지고오너라.오늘은조퇴해두된다.

나는 어쩐지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고 가죽 잠바를 입고 눈매가 날카로운 그 아저씨가 무서웠지요. 집에 가는데 그 아저씨가 따라 왔어요. 함께 돌아오면서 아저씨는 나에게 한 두가지씩 물었어요.

느이 집에 누구 찾아오는 아저씨들이 없니?

아뇨.

엄마는 아직도 시장에 나가 옷장사 하시구?

네.

아버진 어디 나다니시냐?

집에만 계셔요.

집에서 뭘하니?

그냥요….

느이 집에 라디오 있지?

네 있어요.

몇 대나 있냐, 혹시 작은 것 있니?

하나 밖엔 없어요.

아버지 술값은 누가 주는데?

엄마가 아침에 나가시면서요.

집에 가니까 그날따라 아버진 술을 안잡수셨어요. 아버진 일찍 돌아오는 내 등 뒤에 따라 들어서는 그 아저씨를 보더니 화를 버럭 냈지요.

내가 연락을 할텐데 애들 학교까지 쫓아다니면 어떡할 거요. 정말 이런 식으로 할겁니까.

위에선 동향보고를 하라지 오늘까지 연락은 안되지 나한테 화를 내면 뭘해.

아버지는 아저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오셨는데 보통 때보다 술이 많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요. 나는 그날 아버지가 어머니와 언성을 높여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뭔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아저씨가 형사였고 아버지는 이사를 다닐 때마다 그에게 알려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아버지는 술에서 깨어나면 늘 책을 보시곤 했죠.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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