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9)

  • 입력 1999년 2월 12일 18시 57분


그 무렵에 내가 보낸 몇 장의 엽서도 있었다. 아마 그네도 답장을 했을테지만 나에게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도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뀔 때까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

보고싶은 한윤희 선생

재판이 끝났습니다. 결과는 이미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무기징역이 선고 되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실감도 느끼지 못했소. 출정 갔다가 돌아오는데 전담반의 계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부릅디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인데 나에게만 아니라 사형언도를 받은 살인수에게도 그런다고 하더군. 그가 내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소. 뭐라고 했는지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아요. 방에 돌아와 벽에 써있는 앞선 수감자들의 낙서를 보면서 나는 좀 생각해 보았소. 거기 이런 구절이 적혀 있더군. ‘존재하는 것은 행복하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어요. 나는 이틀 밤 낮을 계속 잤는데 자고 일어났는데도 날이 가지 않은 듯 하여 사흘 째에는 밤새 서성이며 새우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 하다가도 오래 견디려면 여길 ‘집으로 삼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나는 내 엽서를 다시 읽다말고 허씨와 최군을 생각했다. 벌써 그들의 이름은 가물가물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들은 둘 다 사형수였다. 허씨는 사십대 초반이었는데 팔년째나 형 집행 대기 중이었으니 아마도 내 나이쯤에 들어왔으리라. 허씨와 나는 같이 독거수라 일반 사동에 있는 독방에 나란히 갇혀 지냈다. 다른 사람들이 세면장에서 목욕을 할 때에 우리 둘은 직원 화장실에 물통 두 개를 들여 놓고 더운 물을 가득 담아 증기탕을 하곤 했다. 허씨는 체격이 크고 힘이 좋아서 때를 잘 밀었다. 그는 물통에 하반신을 담그고 염불을 외우곤 했다. 허씨는 항상 봄이 되면 우울하게 움츠러들어서 거의 말도 않고 지냈는데 대개 철이 바뀌거나 특히 겨울을 난 새 봄에 집행을 많이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들어오기 전에 절에 갖다 맡긴 딸이 걱정 되어서 밤에 혼자 울었는지 어느 날 아침에는 눈이 퉁퉁 붓고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있곤 했다. 내가 겉으로만 걱정하는 기색으로 ‘뭐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설마 사면이 되겠지요’하면 무표정하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억지로 웃으면서 ‘얼른 가야지 다른 사람 들 고생 안시키고’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옮겨온 최군은 얌전하고 똑똑한 청년이었다. 홀어머니가 면회를 다녔는데 그는 손목에 어머니가 보리수로 직접 깎아준 염주를 차고 있었다. 그들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나는 그들의 죽음을 하루 전에 미리 알았기 때문이다. 전담반에서 면담이 있다고 해서 오후 운동시간을 빼먹고 내가 찾아가니까 계장이 무슨 서류에 정신을 파노라고 책상 위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의 등 뒤에서 기다리고 섰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의 어깨너머로 이름이 죽 적힌 명단을 보았고 거기서 허씨와 최군의 이름도 보았다. 뒷전에서 인기척을 느낀 계장은 당황해서 얼른 서류를 뒤집어 놓고는 회전의자를 돌려서 내쪽으로 돌아 앉았다. ‘뭘하는 거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더니 그는 아직도 긴장이 덜 풀린 얼굴로 주위를 돌아 보고는 말없이 한 손을 쳐들었다. 계장은 쳐든 손을 칼처럼 빳빳히 펴서 목을 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대뜸 짚이는 게 있어서 입 짓으로만 ‘언제?’라고 속삭였더니 그도 입짓으로 ‘내일’이라고 말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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