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민병욱/YS가 대선자금 밝힌다면…

  • 입력 1999년 2월 10일 18시 59분


요즘 김영삼전대통령의 심경은 어떨까. 끓는 냄비 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기분은 아닐까. 이럴 바에야 차라리 냄비에서 뛰쳐나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경제청문회에 출석하진 않고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금세 연기하는 해프닝을 보면 김전대통령의 불편한 심기가 조금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심리상태를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국민은 그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닌지, 어떤 돌출행동을 할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6·25이후 최악의 국난을 불러온 장본인이 무슨 할 말이 더 있다고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노골적으로 욕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정황을 보건대 김전대통령이 회견을 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요즘 엄청나게 화가 나 있으며 정권과의 일전불사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한다. 김대중정권이 잘못한 일을 조목조목 짚으며 정치훈수를 둘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무슨 일을 하든 그의 자유겠지만 문제는 그가 무엇때문에 화를 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점이다. 정태수전한보그룹총회장이 자신에게 대선자금 1백50억원을 주었다고 진술한 데 대해 ‘정치보복적 공작’이라며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부분은 과거 그의 언행을 되짚어 보면 화를 낼 사안이 아니다.

김전대통령은 97년 5월30일 국민에게 이른바 ‘중대결심’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한보로부터 대선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그는 “가려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가려내 기탄없이 밝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 때 숨가쁜 상황에서 사용한 자금 규모나 내용을 5년이나 지나 가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언제든 책임질 일이 있으면 결코 회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자, 그렇다면 정태수씨가 1백50억원을 주었다고 주장해 ‘가려낼 수 있는’ 부분을 적시한 지금이 그때의 약속을 지켜야할 시점이 아닌가. 무턱대고 화를 내고 정치공작이라고 몰아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1년반전의 약속대로 책임질 일을 회피하지 않고 맞닥뜨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문제의 한보로부터 대선자금을 받았는지는 물론 비정상적인 대선자금 모금 관행에 대해서도 기억나는 대로 국민에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다.

김전대통령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역시 대선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김대중대통령이나 이회창한나라당총재도 그 전례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87년 대통령직선제를 재도입한 이후 매년 끊임없이 정쟁거리로 등장해 정치를 질곡에 빠뜨렸던 대선자금이란 유령의 굴레를 단번에 풀어버릴 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부문이 21세기를 대비하는 이때 정치만 유독 92, 97년의 철 지난 대선자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99년 지금, 전 현 대통령과 야당총재들이 경쟁하듯 자신의 대선자금 과오를 시인하고 굴레를 벗어던지지 않는 한 그 유령은 21세기에도 꺼지지 않고 우리 정치를 괴롭힐 게 틀림없다.

민병욱〈북국장대우 정치부장〉min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