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중위소대 전역병 인터뷰]『北편지 소지자 단순처리』

  • 입력 1998년 12월 14일 08시 39분


2월 김훈(金勳)중위의 사망 당시 김중위가 소대장으로 있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2소대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그 뒤 전역한 A씨는 10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밝혔다.

그의 설명은 김중위의 타살여부를 판단하는 중요 단서가 될 부분도 많이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A씨가 말한 당시 소대상황 요지.

▼김중위의 사망 당일 행적〓24일 오전 11시20분까지 김중위가 소대장실에 있는 것을 봤다. 오전 11시15분경 병력을 싣기 위해 운전병과 함께 소대장실로 선임 탑승보고를 하러 갔을 때였다. 당시 김중위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선임하사(김영훈중사)는 김중위 옆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평소와 달리 소대장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이다. 불을 끄면 어둡기 때문에 낮에도 항상 불을 켜놓는 곳이다. 그런데 그날은 형광등을 다 끄고 김중사의 스탠드만 켜놓은 상태였다. 또 김중위의 책상위에 아무 것도 없었으며 김중위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소대장님”하고 부르니까 김중위가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떴다. 김중위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신고를 하자 “잘 갔다오라”고 말했다.

오전 10시20분경 경비초소(GP)를 출발해 중대본부에서 소대원 2명을 태우고 오전 11시20분경 다시 GP로 복귀했을 때 김중위가 소대장실 앞에 나와 있었다. 당시 김중위는 전투모를 쓰고 탄띠와 총을 차고 무전기와 수첩을 들고 있었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차안에는 4명이 있었는데 김중위는 탑승자와 눈을 맞춘 뒤 사병막사 쪽으로 내려갔다.

오전 11시25분에 다시 GP를 출발해 중대본부로 내려가 3명을 추가로 태우고 11시45분경 GP로 복귀했을 때 소대장실 앞에 서 있던 김중사를 발견하고 소대장의 거처를 물어보자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보고 하고 가라”고 말했다.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낮 12시10분경 근무를 서기 위해 중앙통제실(TOC)로 갔다. TOC에서 근무중이던 12시25분경 상병이 TOC로 와서 “소대장이 벙커 3에 쓰러져 있다”고 보고했다. 순간 ‘좁은 벙커 속에서 중화기 등을 잘못 만지다가 다쳐 쓰러졌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이어 다른 동료들이 “소대장이 북한군(KPA)에 총을 맞았다”고 외치며 들어와 그런 줄 알았다가 이후 선임하사가 “자살한 것 같다”며 부대에 비상을 걸라고 지시해 12시30분경 비상을 걸었다.

▼사병들의 근무상황〓2소대의 인원은 모두 45명이다. 이 중 휴가자를 제외한 나머지 소대원은 35∼40명.

전날 야간근무를 서고 막사 안에서 취침중이던 대원이 12명 가량이었으며 수색에 나갔던 인원은 10여명이었다. 따라서 사고시간으로 추정되는 11시45분에서 12시15분 사이에는 13∼18명이 깨어 있었던 것 같다.

이 중 TOC에 3명이, 1번 감시초소에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1번 감시초소에서 근무중이던 사병이 11시40분경 김중위가 9번 벙커에서 3번 벙커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올렛 관측초소(OPO)에 있는 16개 벙커는 야간과 이른 아침에만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했던 소대원들은 7,8명 정도였다. 나머지 사병들은 평상시 근무가 없을 경우 대개 막사에서 취침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김중위와 중대장〓김중위는 중대장 김익현(金益賢)대위의 잦은 질책과 업무부담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매일 오전 업무보고 때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중대장에게서 호된 질책을 받았다는 말을 중대장실의 한 사병에게 들었다.

김중위는 다른 소대장들에 비해서도 중대장으로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중대장은 같은 시기에 부임한 3소대장은 꼼꼼하게 업무처리를 잘 한다며 관대하게 대했던 반면에 김중위에게는 매우 깐깐하게 대했다.

게다가 소대원들의 북한군 접촉사실과 구타사고 등이 유독 2소대에서 잇따르자 2소대는 중대장에게서 ‘미운털’이 박혔다.

중대장이 ‘2소대는 문제소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터에 신임소대장인 김중위의 업무파악이 덜 돼 업무처리가 미숙하자 더욱 심하게 질책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대평가에서 2소대가 꼴찌를 하는 바람에 소대장의 마음고생이 더 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김중위와 김중사 및 소대원과의 관계〓김중사가 부대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는데다 경험이 많아 김중위가 부대장악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신임소대장과 선임하사간에 생기는 그런 문제는 어느 부대에나 통상적으로 있는 일이다.

두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실제로 두 사람이 같이 근무한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김중위는 평상시 소대원들 앞에서 얼굴 표정이 거의 없어 화가 났는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김중위의 성격이 내성적이라 때로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김중위가 소대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북한군 고위간부가 판문점에 오면 철저히 녹화하기 위해 감시카메라를 조정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대장에게 소대원들이 질책을 많이 받은 후 김중위가 소대원들을 식당으로 불러 “그따위 식으로밖에 못하느냐”며 크게 화를 냈다.

이에 대해 소대원들은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며 황당해했고 김중사도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느냐”고 김중위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했다.

▼사병들의 북한군 접촉 실태〓지난해 1월 JSA 소속 병장과 일병 2명 등 3명이 북한측이 보낸 편지를 지니고 소대 차량을 타고 가다가 미군 헌병에게 적발됐다. 군수품 빼돌리는 것을 잡아내기 위해 불시에 실시된 검문에서 북측에서 보낸 편지가 나온 것이다. 계통에 따라 즉시 김익현대위를 비롯해 대대장과 미군측 고위 군사관계자에게까지 보고됐다.

편지는 김정일(金正日)이 판문점에 와서 북한군을 격려하고 금딱지 시계를 전 장병에게 하사했다는 내용이었다고 중대장에게서 들었다.

중대장 김대위는 적발 직후 이들 3명을 불러 진술서를 쓰게 한 뒤 영창을 보냈으며 이들이 부대로 돌아오자 최고참인 병장은 한국군으로 원대 복귀시켰다. 일병 2명은 원래대로 2소대로 복귀시켰다.

중대장 김대위는 중대원들에게 한시간여에 걸쳐 “이같은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기 때문에 지시 불이행으로 처리했으며 병장은 고참이니까 원대복귀시켰다. 앞으로 북측과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김대위는 또 “편지는 모두 영어로 번역돼 이미 상부에 보고됐으며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구속이다. 이번 사건으로 미군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한국군이나 미군측에서 조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없었으며 사병들의 대북접촉은 거의 중단됐다. 북측 병사들은 JSA병사들이 만나주지 않으니까 “왜 자꾸 피하느냐”며 선물이나 편지를 던지며 심리전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김중위와 사병들의 북한군 접촉〓김중위가 판문점에서 근무한 것은 4박5일 뿐이었다. JSA 소속 소대는 판문점→올렛 관측초소→비상대기조(ALERT)→훈련→휴식(OFF) 등으로 4박5일씩 순환 근무하기 때문에 김중위가 JSA 소대장으로 온 것은 한 달이 좀 넘었지만 판문점 근무는 며칠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 기간에 사병들이 북한군과 접촉하는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은 힘들다. 특히 2월3일 북한군 변상위가 넘어온 이후 사병들은 거의 북측 병사들과 접촉을 하지 않았다.

또 김중위의 노트에 적힌 ‘사병들이 북한군과 접촉을 하고 있다’는 내용은 김중위가 직접 사병들의 행동을 목격하고 쓴 것이 아니라 중대장의 지시 사항을 단순히 받아 적은 것 같다. 김중위가 사병들에게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김익현대위도 13일 오후 본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윤종구·이 훈·이호갑기자〉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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