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홍식/중도좌파 집권 「유럽의 새물결」

  • 입력 1998년 10월 1일 19시 57분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오랜 기간의 동면에서 깨어나 새롭게 부활하면서 ‘분홍물결’이 일고 있다. 지난달 27일 독일총선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이 승리해 녹색당과 ‘적록(赤綠)연정’ 수립에 착수함으로써 유럽연합 15개국 중 스페인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13개국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중도좌파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96년 이탈리아에서 좌파연합이 집권하고 이어 97년에는 영국의 노동당과 프랑스의 좌파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한 뒤 독일에서의 좌우 정권교체로 유럽 4대 강국은 모두 사회민주주의적 실험기에 돌입했다.

유럽에 부는 분홍바람의 표면적 원인은 우파세력의 장기 집권이다. 이탈리아의 기독교민주당은 전후 50여년간 연속 집권하면서 당 정부 기업 마피아가 연결된 부패사슬의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영국에서는 대처―메이저의 보수당 정권이 18년간 장기집권했고 독일의 콜총리는 16년간 장수했다. 유럽인들은 기존 정부에 대한 염증을 대체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표현한 것이다.

▼ 새로운 사회주의 표방

사회주의 정당들은 젊은 리더를 선거에 내세워 국민의 변화욕구를 성공적으로 충족시켰다. 영국의 블레어, 프랑스의 조스팽, 이탈리아의 프로디 총리와 독일의 슈뢰더총리예정자는 모두 선거 당시 40대 또는 50대의 전후세대로 21세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적합한 인물들로 비쳐졌다.유럽 정치지형 변화의 구조적인 원인은 우파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반발이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80, 90년대 정부가 시행한 정책, 즉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등은 기업의 구조조정기와 맞물려 대량실업을 양산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

게다가 99년 출범하는 유럽 단일화폐권(유러랜드)에 참여하기 위해 각국의 정부가 추진한 재정긴축정책은 복지예산의 삭감으로 이어졌고 실업과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집권 사회당은 유러랜드의 출범에 맞추어 유럽연합 차원의 경기부양을 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90년대 중반 등장한 좌파 정권들의 공통된 특징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영국의 블레어는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과거 좌우파의 편향적 정책지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는 야망을 보여주고 있다.

런던정경대학장이자 저명한 사회학자인 기든스는 신노동당 정부의 정책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는 최근 발간된 저서 ‘제3의 길’에서 과거의 사회주의가 사라진 지금 기존의 좌우파 개념으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환경이나 유럽통합 또는 세계화가 던지는 도전에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히 세계화와 관련하여 국제금융자본의 투기적 이동을 통제해야 하며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통해 사회의 통합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사회주의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반시장적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의 신사회주의는 시장기제를 활용하되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해 가겠다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디와 조스팽 정부는 국영기업의 부분적 민영화와 같은 우파적 개혁과 동시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분담’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좌파의 신참 총리인 슈뢰더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 생산력의 국유화나 중앙집중적인 복지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구사회주의가 국가중심적인 사고에 묶여 있었다면 신사회주의는 시민사회의 자체적 연대강화를 통한 사회개혁을 선호하고 있다. 노사정협약을 통한 경제사회정책의 운영은 이러한 성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휴머니즘에 복귀 의미

유럽 신사회주의 실험이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유럽의 사회적 자본주의 모델은 미국의 순수 시장적 자본주의 모델에 대해 강력한 도전을 제기할 것이다. 내년에 유럽단일화폐권이 출범하면서 달러와 유러를 통한 미국과 유럽간의 경쟁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통화는 단순한 경제적 의미를 넘어 사회문화적 의미를 내포하게 될 것이다.

유럽 좌파세력의 야심찬 계획은 ‘야만적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같은 변화는 유럽좌파가 이미 깨져버린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몽상을 묻어버리고 초기 사회주의의 바탕이었던 휴머니즘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좌파의 실험은 21세기 한국사회가 선택할 선진자본주의 모델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인간적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면 굳이 야만적 자본주의를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홍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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