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양귀자씨 새 장편소설 「모순」

  • 입력 1998년 7월 27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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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소설 ‘천년의 사랑’으로 ‘귀신도 책을 읽게 만든다’는 유행어를 낳을 만큼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작가 양귀자(43). 3년간의 침묵을 깨고 새 장편소설 ‘모순’(살림)을 내놓았다.

‘모순’의 주인공은 스물다섯살의 사무직 여직원 안진진. 의도된 포석이었을까. ‘천년의 사랑’에서 시공을 넘나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던 작가는 신작에서 아예 소설시장의 최대 독자층인 이십대 여성 직장인으로 ‘시점’을 이동해 독자들에게 육박해 들어간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꽃피는 3월 어느 아침,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전 생애를 걸고라도 인생을 탐구하며 살겠다’는 각오를 세우는 안진진. ‘스물다섯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으며 단 한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적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 보내고 있는 나’를 반성하게 된 계기는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어렴풋한 자각 때문이다. 진진에게 구혼해 오는 두 남자. 야생화를 찍는 가난한 사진작가 김장우와 정시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기차처럼 인생을 완벽한 계획표에 따라 운행하는 전문직 샐러리맨 나영규. 특별한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사랑이 감옥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하는 장우와 사랑을 느끼지는 않되 편안한 영규. 마치 TV코미디프로그램의 선택게임처럼 ‘처음에는 비슷해 보였으나 나중에는 아주 다른 길이 되고 말’ 두개의 길 앞에 서 있는 진진에게는 참고로 삼을만한 흥미로운 교과서가 있다.

결혼이라는 단 한번의 선택 때문에 일란성 쌍둥이 자매이면서도 주정뱅이 남편의 매맞는 아내와 성공한 사업가의 사모님으로 판이하게 다른 인생을 살게된 엄마와 이모. 두사람의 삶만큼이나 달랐던 진진 남매와 사촌 주리 남매의 인생.

그러나 작가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대요’라고 이모의 삶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늘 행복의 절정에 있는 것같던 이모가 ‘나는 늘 지루했어. 그래서 그만 끝낼까해’라는 유서를 진진에게 남기고 자살하는 것. 단 한번도 결핍을 경험해본 일 없이 무덤 속처럼 평온했던 자신의 삶보다는 알콜중독 남편과 가출하는 딸 툭하면 주먹질로 파출소에 끌려가는 아들 뒤치다꺼리에 늘 씽씽 바람을 내며 사는 것 같던 진진의 어머니를 부러워했던 이모.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는 진진.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게 한없는 불행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진진…. 동류의 인생인 장우 대신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종류의 삶인 영규를 택한다. 작가는 때로 위악(僞惡)을 가장하며 세심한 관찰자로서 진진과 주변의 삶을 그려낸다. 그러나 소설의 흡인력은 구성이나 인물형, 문체의 완성도보다는 진진의 입을 빌어 중년의 작가가 한마디씩 던지는 이런 말들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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