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 칼럼]타협밖에 길이 없다

입력 1998-07-24 19:40수정 2009-09-2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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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정부의 국정철학이라는 ‘민주적 시장경제’의 정체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체계적으로 해설하는 교과서도 없다. 단지 경제는 시장자율에 맡기되 시장의 열패자(劣敗者)는 국가가 적극 보호한다는 의미 정도로 막연하게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도 김대중정부는 ‘민주적’이라는 사회적 형평에 더 비중을 두는지, ‘시장경제’라는 무한경쟁에 더 비중을 두는지 명쾌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민주적 시장경제’는 모호하다.

▼ 협공받는 노사정委 ▼

구조조정과 고용안정의 경우도 비슷하다. 기업의 경쟁력을 살리기 위해서 노동시장 유연화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주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의 고용조정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한다. 그 고통이 지금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도 김대중정부는 구조조정과 고용안정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지 않고 있다. 경쟁력과 형평성 사이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과 고용안정은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두마리의 토끼다. 구조조정을 통해서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고용안정을 통해서 정치 사회의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두가지 명제가 날카롭게 충돌한다. 그 갈등을 풀기 위해 고안한 것이 노사정협력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의 창출이고 그것이 곧 김대중정부가 자랑하는 노사정위원회의 출범이다. 그런 뜻에서 노사정위원회는 ‘민주적 시장경제’의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

그 노사정위원회가 지금 노동자와 사용자 양측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다. 노사 양측 모두 협력을 거부하는 이 위험한 사태는 노사정위원회의 위기이자 김대중정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일부 호전 기미를 보이는 경제를 다시 위기에 빠뜨리고 모처럼 시험대에 오른 참여민주주의를 싹부터 자르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다 아는 대로 김대중정부는 약체정부다. IMF와 국제 금융자본은 개혁이 순조롭지 않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정부를 압박할 수단을 가지고 있고, 재벌과 기득권세력은 정부의 힘에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발견되면 즉각 저항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관료세력은 땅에 엎드려 시간을 재고, 야당과 보수세력은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를 노린다. 만약 고용조정에 반발하는 노동계마저 이 저항의 대열에 본격 가담하면 김대중정부의 개혁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지만 김대중정부가 구조조정의 직접 피해자인 노동자들을 얼마나 성의있게 설득했는지를 심각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는 그간 부분적인 파업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파국은 피하려는 몸짓을 보여왔다. 그런데도 정부는 공기업민영화 등을 결정하면서 노사정위원회에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노동계가 노사정위원회로부터 철수할 구실을 준 것이다. 그래놓고 노측의 파업위협에 밀려 양보를 거듭하고 이것이 마침내 사용자측의 반발을 불렀다. 정부가 노사 양측의 협공을 자초한 셈이다.

노사정위원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련 당사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명시적인 합의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부의 결정사항에 대해 노측과 사측의 의견을 청취하는 단순한 통과의례로는 협력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래서 노사정위원회가 법적 장치를 갖춘 사회적 협약기구로 격상돼야 한다. 부처간 영역이 불분명해져서 조직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노사정위원회를 대통령자문기구로 묶어두는 것은 노사정위원회의 출범 정신을 망각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리해고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협박이나 도덕적 설득으로 해고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약하다. 더구나 최근 10여년 동안 투쟁 일변도로 힘을 다져온 노동계는 타협의 문화를 충분히 몸에 익히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투쟁할 때가 아니다. 사용자측이 테이블을 걷어찰 때도 아니다. 노사 양측이 타협을 통해 희생을 나누고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때다.

▼ 궁극적 책임은 정부에 ▼

노동자와 사용자를 이 제3의 길로 인도할 궁극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정부가 확고한 의지와 리더십으로 노사 양측이 고통을 공정하게 분담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고용안정과 실효성 있는 실업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사용자측은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 호응해 정부의 약속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측도 다시 파업에 나서서는 안된다. 파업의 대가는 너무 크다. 지금 노사정에 주어진 선택은 타협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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