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8월의 크리스마스」,나란히 오는 죽음과 사랑

입력 1998-01-19 08:40수정 2009-09-2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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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남자가 있다. 하나하나 생을 정리해도 길지 않은 시간인데 예쁜 여자 하나가 그의 앞에 뛰어든다. 어쩌나.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은데…. 여기까지 줄거리가 나오면 관객은 음, 뻔한 얘기로고…하며 몸을 뒤로 젖힌 채 팔짱을 낄 것이다. 여자관객들은 손수건을 꺼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이같은 예상을 조용히 비켜간다. 영화속엔 사랑한단 말 한마디 안나온다. “죽으면 안돼, 흑흑”식의 대사따위는 더더구나 없다. 키스신은 커녕 빗속에 한 우산을 쓰고 점점 가깝게 몸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유일한 접촉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한국 멜로영화의 상투성을 거부한다. 신인 허진호감독은 감정 속에 한없이 파고들거나 그것을 터뜨리기 보다는 감정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여백을 남기는 편을 택했다. 담담하게 그렸다고 하기엔 무서운 절제력이다. 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은 사진사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직업인 셈이다. 다림(심은하)은 주차단속원. 주차위반 사진을 맡기기 위해 매일, 일상적으로 사진관을 찾을 수 있는 직업이다. 카메라는 사진관 카운터 앞뒤에서 만나기 시작한 두 사람의 심리를 멀찍이서 천천히 따라 움직인다. 다림이 사진관 내실을 둘러보는 움직임을 통해 정원의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한 사랑을 보여주고, 아이스크림 통속에서 부딪치는 두개의 숟가락으로 쨍그랑 부딪는 두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제는 고인이 된 유영길 촬영감독은 햇살이 보일 것만 같은 눈부시게 선명한 화면으로 저물어가는 주인공의 생과 그 안에 밴 아릿한 슬픔을 역설적으로 담아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정원은 늘 웃는다. 그의 일상은 밝고 따뜻하고 담담하면서 넉넉하게 그려진다. 남아있게 될 가족을 위해 사진관을 정리하고 미소를 띤 채 영정사진을 찍는다. 죽음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아이로니컬한 제목처럼 죽음속의 삶, 삶속의 죽음은 마지막을 대하는 정원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영화속 등장인물들은 가슴 저미는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끝까지 정원의 죽음을 모르는 다림은 사진관에 내걸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활짝 웃는다. 그럴줄 알고 정원은 끝끝내 가슴속 사랑을 내비치지 않았을게다. ‘흥행 보증수표’라 불리는 한석규는 이 영화의 주제가 “정리정돈을 잘하자”라며 웃었다. 감독의 의도대로 여운을 담아갈지, 밋밋한 영화라며 하품을 할지는 이제 관객의 몫이다. 24일 개봉. 〈김순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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