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낙연/가네마루와 JP

  • 입력 1998년 1월 19일 08시 14분


▼생전에 그의 세도는 대단했다. 장관들의 목을 붙였다 뗐다 하고 총리(수상)임기도 늘였다 줄였다 했다. 공식직함은 전(前)부총리였으나 총리 자리를 노리지도 않고 막후에서 온갖 것을 주물렀다. 그래서 전성기에는 일본정치의 ‘오고쇼(대가)’로 불렸다. 자민당 다케시타(竹下)파 최고실력자 가네마루 신(金丸信)이다. ▼그는 76세이던 90년 9월27일 묘향산에서 78세의 김일성(金日成)과 만나 북한―일본 수교교섭을 시작하자는 데 합의했다. 다음날에는 평양에서 북한노동당 국제부장 김용순(金容淳)과 수교에 관한 8개항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공동선언은 36년간의 식민지배뿐만 아니라 전후(戰後) 45년간 북한 인민이 입은 손실에 대해서도 일본이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동선언의 ‘전후사죄배상’에 일본 외무성은 발칵했다. 한일(韓日)수교와 형평을 기하려는 정부입장에 배치하는 데다 정치인이 외교에 너무 깊숙이 참견했대서였다. 김종필(金鍾泌)자민련명예총재가 지난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총리와 만난 뒤 한일어업협정 ‘합의파기론’이 대두하자 한국 외무부가 반발한 것과 닮았다. “진의가 왜곡됐다”는 김명예총재의 해명으로 일단락됐으나 뒷맛은 남는다. ▼‘12.18’ 대통령선거 때 일부 일본 외교관들은 개인적으로 김대중(金大中)후보의 낙선을 전망하거나 은근히 희망했다. 상대하기 버겁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김명예총재와 박태준(朴泰俊)자민련총재가 일본에 매우 깊고 넓은 인맥을 가져 양국 외무부가 일하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외교관의 외교’에도 한계는 있다. 그러나 외교를 포함한 행정에 정치가 너무 끼여드는 것은 좋지 않다. 〈이낙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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