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잘잘못 짚어주는「슬로비디오」…대국흐름 쉽게 파악

  • 입력 1998년 1월 9일 08시 23분


이창호(李昌鎬)국수와 서봉수(徐奉洙)9단이 맞붙은 국수전 2국. 서9단이 1백분의 장고에 들어가자 쟁쟁한 프로기사들이 검토실에 모여 ‘변화의 수’를 검토했다. 이때 조훈현(曺薰鉉)9단이 검토실로 ‘출근’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국을 중계하는 폐쇄회로TV 화면을 흘끗 쳐다본 뒤 첫수부터 복기를 해나갔다. 마치 대국을 지켜본 것처럼 완벽한 복기였다. “바둑의 흐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프로기사는 처음 본 대국을 복기해내는 조9단의 ‘비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복기(復棋)는 기력을 연마하는 지름길. 프로들은 “바둑이 끝나면 곧바로 새 판을 두려 하지만 이 보다는 복기를 하는 편이 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충고한다. 복기는 자기 실수를 발견하고 국면 운영의 넓은 시각을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훈련’이라는 지적이다. 면밀한 자기반성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 MF) 경제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 한국기원 연구생들은 한번 대국을 하고 나면 적어도 두세번씩 복기하는 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변화의 수를 연구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대의 ‘의도’를 탐색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상대가 공격적인지, 위기상황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프로들은 공식대국 후 복기를 하는 게 원칙이다. 일본의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9단 등은 특히 복기에 적극적이다. 자신이 패해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진지하게 복기한다. 이들의 복기는 30분을 넘기기 일쑤. 반면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9단은 질 경우 거의 복기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오만함 때문일까. 마9단은 중국 1인자의 자리를 후배 창하오(常昊)8단에게 빼앗겼고 이창호9단에게는 10연패를 당하는 최악의 슬럼프에 빠져 있다. 프로들은 “복기를 하는 데 천재적인 머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3∼5급 정도면 복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초급자도 서로 상의를 해가면 복기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양재호(梁宰豪)9단은 “바둑을 두는 것보다 복기가 기력 향상에 더욱 유익하다”면서 “스포츠에서 잘잘못을 분석하기 위해 슬로비디오를 보듯 기력 향상을 위해서는 복기를 많이 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최수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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