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공성진/이제서야 미래가 보인다

  • 입력 1997년 3월 12일 20시 10분


지난 92년 대통령선거 직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라는 제하의 한 신문 칼럼을 통해 당시 세 유력 후보자 중 가장 무능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때 한국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었다. 왜냐하면 21세기는 깨어난 국민을 요구하는데 유능한 지도자는 사실 국민의 잠재력을 일깨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 갈 데까지 간 정치 ▼ 우리는 지금 한심한 정권하에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등 모든 부문에서 더 이상 끝간 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계곡의 끝에 이르러 있다. 동시에 이래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각성의 「호기(好機)」도 마주하고 있다. 주인집 안방에서 칼국수 쇼가 벌어지는 동안 수조원의 국민예금이 마당쇠들의 먹이사슬에 걸려 분탕질되고 말았다. 또한 대명천지에 「비선(秘線)」인지 무엇인지를 통한 도련님의 국정개입설이 급기야 사실로 드러나면서 새삼스레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과거의 정권에서도 낯익었던 전형적인 후진국 정치행태에 불과하다. 문민정부라는 신화(神話)에 대한 그나마의 기대가 거품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지금의 이 좌절과 분노가 정제되고 나면 우리는 현 정권의 반면교사(反面敎師)역할에 감사해야 한다. 무능한 지도자라야 국민이 깨어날 수 있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 정권하에서 우리는 발밑에 더 깊은 심연(深淵)이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됐다. 남은 것은 올라야 할 높은 봉우리와 처절한 생존욕구 뿐이다. 이것이 때로는 집단이기주의로, 상호긴장과 충돌 그리고 무질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조짐들은 오히려 21세기가 요구하는 적자생존의 시장주의(市場主義)에 적응하고 도전할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도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빠른 구조조정기를 거쳐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 대한 열화같은 의욕이 분출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 물꼬를 오늘 선출된 신한국당 대표가 먼저 터야 한다. 비록 관리자의 역할이라고는 하지만 김심(金心)보다는 일그러진 민심(民心)을 투영하여 대선주자들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야를 막론한 정치지도자들도 이전투구와 합종연횡이라는 낡은 동네싸움으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스스로 상처를 입어서도 안된다. 지난 대선에서 부통령후보로 나서 실패했음에도 미국 공화당의 유력한 차기 주자인 잭 캠프의 정치적 진지함이 생각난다. 향후 미국의 진로는 중국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며 공약개발 차원에서 중국의 각 성(省)을 2년간 실사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도 대중성의 부재로 과감히 중도 포기하고 보브 돌의 러닝메이트로 뛰었었다. ▼ 이젠 계곡서 봉우리로 ▼ 곧 한국을 방문할 미국 민주당 소속의 부통령 앨 고어는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며 오래전부터 매달한 번씩 분야별 전문가들과 세계전략에 관한 난상토론을 정례화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통령이 되는 즉시 실천할 수 있는 미국의 정책이 이미 여물어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후보자들은 어떠한가. 아이들 술래잡기하듯 슬그머니 여론의 틈새를 찾거나 선문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계곡의 끝에 머무를 시간도 많지 않다. 가려줄 거품도 없으려니와 도토리 키재기식의 보물찾기도 식상할 따름이다. 시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후보에게 일찍 힘을 주어 다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 계곡이 깊어야 봉우리도 높은 법이다. 공성진<한양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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