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묵은 판례가 만든 면죄부… ‘그놈’은 웃으며 법정 떠났다[히어로콘텐츠/히든③-下]

  • 동아일보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3회〉 돈세탁 마지막 단계는 ‘소송’
대포통장 신고에 소송 4년간 306건
‘법정 세탁’ 5.4배로 증가 추세
“축의금 받은것” 등 주장도 통해
일부 로펌 ‘승소 전략’ 내세우기도
“빈털터리 된 피해자에 2차 가해”


서울 동대문구에서 25년째 피아노를 가르쳐 온 송현숙 씨(71)는 보이스피싱 한 번에 모든 통장이 묶이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피해금이 흘러간 통장의 주인에게 소송까지 당했다.

● 2억 잃고 통장까지 묶인 70대
시작은 2024년 12월 ‘가짜 검사’의 전화였다. 실존하는 검사의 이름을 댄 상대는 송 씨가 통장을 위조해 1억4000만 원을 투자받았다며 그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다. 겁에 질린 송 씨는 시키는 대로 영상통화로 신분증과 휴대전화 화면을 내보였다. 일당은 그 정보로 인터넷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어 1억 원을 대출받았다. 수십 년 적금으로 모은 1억2800만 원에 대출 1억 원까지, 피해액은 2억2800만 원이었다. 은행 직원이 “보이스피싱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송 씨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 전화 너머에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 씨의 신고로 대포통장이 동결되자 소장이 날아왔다. 소송을 건 통장 주인은 베트남인이었다. 그는 “보이스피싱은 모르고, 한국 돈을 베트남 돈으로 합법적으로 환전해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상적인 환전이라면 돈을 받은 뒤에 내주는 게 순서지만, 그는 거꾸로 베트남 돈을 먼저 내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결과는 송 씨의 패소였다.

지금 송 씨에게 남은 건 체크카드 한 장이다. 다른 통장은 전부 묶여 20년 부은 보험까지 전부 해약해 대출을 갚았다. 이 일로 남편과는 별거 직전까지 갔다. 송 씨는 체념하듯 내뱉었다.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요….”

● 법정 세탁 4년 새 5배로… 피해자는 90% 졌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분석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이뤄진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문 중 일부.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분석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이뤄진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문 중 일부.
취재팀은 법원도서관에 공개된 2021~2025년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문 중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통장의 주인이 제기한 것을 전수 집계했다. 소송을 당한 이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신고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한 재판만 추렸다. 총 306건이었다.

주목할 건 증가세다. 2021년 29건이던 소송은 지난해 156건으로 4년 새 5.4배로 늘었다. 소송이 늘어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기면 통장이 되살아나고, 그 안에 묶여 있던 피해금도 가져갈 수 있다. 통장도 다시 보이스피싱 등에 쓸 수 있다. 대포통장 조직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이는 지하 금융권에 이미 공식처럼 퍼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진 비율은 지난해엔 91.7%까지 치솟았다. 통장 주인이 범죄 조직원으로 확인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피해자가 스스로 물증을 찾아 고소하거나, 이 씨 사례처럼 전혀 별개의 수사에서 우연히 증거가 튀어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통장이 범행에 쓰인 줄 몰랐던 주인이 억울하게 묶인 통장을 풀려고 소송한 사례도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판결문 상당수에는 돈이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흩어지는 등 정상 거래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담겨 있었다.

● 28년 묵은 판례가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법원이 수상한 통장 주인의 손을 기계적으로 들어주는 배경에는 1998년 대법원 판례가 있다. 통장 주인이 “갚아야 할 돈이 없다”고 주장하면, “있다”는 증거는 피해자가 대야 한다는 논리다. 당시만 해도 이 소송은 주로 계약서를 가진 기업끼리 다투는 데 쓰였다. 하지만 이 논리가 보이스피싱 사건에도 그대로 쓰이면서, 피해자가 “사기가 맞다”는 증거를 대야 하는 구조가 됐다. 피해자로선 수사도 안 끝난 상황에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범죄 조직과 어떤 관계인지 알 도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 판례 탓에 법원은 통장 주인의 주장이 수상해도 그 손을 들어준다. 지난해 2월 서울남부지법은 총 2억6300만 원이 걸린 소송에서 피해자 3명이 아닌 통장 주인에게 승소를 안겼다. 재판부 스스로 “돈이 입금되자마자 몇 분 만에 다른 통장으로 이체되는 거래가 반복됐고, 코인 환전업자라고 주장하지만 거래 자료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고 지적했지만 결론을 바꾸지는 않았다. 피해자가 직접 사기 공모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석연찮은 해명도 법정에선 줄줄이 통했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달러 1000만 원어치를 신고 없이 판 통장 주인에게도 승소 판결을 했다. 외화 거래 규정을 위반했다고 해서 그 거래 자체가 가짜라는 증거는 없다는 논리였다. 부산지법은 평일 저녁에 대포통장에서 흘러간 600만 원을 “결혼 축의금”이라고 주장한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들을 대리해 온 김기연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가 상대와 보이스피싱 조직의 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며 “사기로 빈털터리가 된 피해자에게 소송이 2차 가해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 수사 중에도 면죄부… 돈벌이 수단 삼는 로펌
경찰 수사가 한창인데 원고가 이기는 일도 벌어진다. 지난해 7월 수원지법 안양지원은 총 3160만 원을 잃은 피해자 2명이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호소했는데도 통장 주인의 승소로 결론 냈다. 통장 주인이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불법 환전을 한 정황이 있는 통장 주인에게 “그것만으로 보이스피싱 가담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승소 판결을 했다.

일부 법무법인은 이런 구조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한 법무법인은 5년간 관련 소송 수십 건을 맡았는데, 홈페이지에 1998년 대법원 판례를 활용한 그동안의 승소 전략을 알리며 법의 허점을 파고든 소송을 광고했다. 이 법무법인 측은 “예전에 홍보한 내용이고, 최근에는 관련 소송을 많이 맡지 않는다”며 “수임 전에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고 사기 연루가 아닌 정말 억울한 사례인 경우에만 수임한다”고 해명했다.

통장 주인이 낸 소송에서 피해자가 단 한 번도 못 이긴 법원도 있었다. 인천지법은 2021~2025년 접수된 19건에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통장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문제가 된 유형의 소송은 대법원 판결을 통한 판례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사법행정 차원에서 개선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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