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여성 성리학자가 쓴 ‘한글 조리서’로 17세기 조선을 엿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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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의 표준 영정. 장계향은 19세에 결혼해 7남 3녀를 낳아 양육하면서도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제공
장계향의 표준 영정. 장계향은 19세에 결혼해 7남 3녀를 낳아 양육하면서도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제공
우리나라의 음식과 조리에 관련된 문헌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조리 관련 서적은 ‘산가요록’ ‘수운잡방’ ‘쇄미록’ ‘음식디미방’ ‘도문대작’ ‘동의보감’ ‘산림경제’ ‘규합총서’ 등이 대표적입니다. 대부분 조리서는 남성이 한문으로 기록했습니다. 산가요록이나 동의보감은 질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기록했습니다.

이 중 여성이 한글로 기록한 조리서가 있습니다. 양반가에서 먹는 다양한 음식의 조리법을 자세히 기록해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바로 장계향이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음식의 맛을 내는 비방)입니다.
○여성 성리학자가 쓴 조리서
장계향(1598∼1680)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성리학자입니다.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여성 성인을 꿈꾸고,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쓴 여성 학자, 10명의 자녀를 바르고 어질게 양육한 어머니, 재주보다 선행을 강조한 교육자, 병자호란 중 어려운 백성을 구휼한 사회사업가, 10여 편의 뛰어난 시를 남긴 시인, 당대 학자들이 감탄한 초서체의 대가 등으로도 불립니다.

장계향의 아버지 장흥효(1564∼1634)는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 류성룡 등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장흥효는 자신의 학문 세계를 딸 장계향에게 전수하였고, 장계향은 13세에 ‘성인음’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성인이 살던 시절에 태어나지 못해/성인의 얼굴 뵙지 못했어도/(경전을 통해)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성인의 마음 쓰심을 넉넉히 알리”라고 썼습니다. 13세의 어린 소녀가 당당히 성인의 삶, 군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장계향은 성현의 삶을 실천에 옮기는 노력도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주변의 농민들이 전쟁, 흉년 등으로 굶주릴 때 도토리 죽을 만들어 구휼했다는 기록과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옛 음식 문화 엿보이는 음식디미방
말년에는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했다. 음식디미방은 책 표지 한자로 ‘규곤시의방’이라고 적혀 있고 본문 첫 줄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고 쓰여 있다. 규곤시의방이란 제목은 후손들이 격식을 갖추기 위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제공
말년에는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했다. 음식디미방은 책 표지 한자로 ‘규곤시의방’이라고 적혀 있고 본문 첫 줄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고 쓰여 있다. 규곤시의방이란 제목은 후손들이 격식을 갖추기 위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제공
장계향이 쓴 음식디미방은 예로부터 전해오거나 장계향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 등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한 책입니다. 17세기 중엽 한국인들의 식생활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귀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음식디미방은 조리 재료에 따라 조리 항목을 면병류(면 요리와 떡), 어육류, 채소류, 주류(술) 등으로 나누고, 해당 항목의 조리 품목을 한 가지씩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육류의 경우 어전법(생선으로 전을 만드는 법), 어만두법(생선으로 만두를 만드는 법), 해삼 다루는 법 등의 순서로 조리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은 한문 조리서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조리 용어 대신 일상적이고 쉬운 언어로 조리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한문 조리서에서 사용하는 진말(眞末), 점미(粘米) 등의 식품 이름을 밀가루, 찹쌀 등으로, 박할(薄割) 등 조리 용어를 얇게 썰다 등으로 한글화하였습니다. 우리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는 ‘섞다, 끊이다, 삶다, 잘게 다지다, 송송 썰다’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와 조미료의 양, 길이, 크기 등의 표현도 일상적이고 쉬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음식에는 양념 재료로 고추와 마늘을 많이 사용합니다. 음식디미방에 사용된 양념 재료에는 고추와 고춧가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마늘보다는 생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매운맛을 내는 조미료는 후추, 천초(초피나무의 껍질), 겨자 등을 사용했습니다. 음식디미방의 조리과정에서 많이 사용한 양념의 빈도는 후추, 천초, 생강의 순으로 나타나며 마늘은 한 가지 종류의 조리과정에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음식디미방은 양념 재료의 변천사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은 다양한 종류의 발효식품, 특이한 음식 재료와 조리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쌀, 찹쌀 등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만드는 ‘순향주법’을 비롯하여 약 51종의 전통주 제조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전체 146항목 중에서 술 만드는 법이 51항목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류층 가정 주부가 하는 일 중에서 술 빚기와 손님 접대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음식 재료와 조리 방법에는 상화법, 웅장, 꿩김치법, 꿩짠지, 꿩지히 등이 눈길을 끕니다. 상화법은 밀가루와 밀기울에 누룩과 술을 섞어 부풀린 다음 찌는 요리 방법이고, 웅장은 곰 발바닥을 음식 재료로 굽는 조리 방법입니다. 꿩김치법, 꿩짠지, 꿩지히는 모두 꿩고기와 오이지를 재료로 함께 섞어 삭히거나 볶는 조리 방법입니다. 당시에는 농사에 소가 귀하게 쓰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꿩이 소고기를 대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음식디미방에는 우리 음식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옛날과 오늘의 음식문화를 비교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사라져버릴 뻔한 전통 조리법을 발굴할 수 있는 지침서로서도 그 가치가 높습니다.



이환병 고척고 교사
#장계향#조리서#여성 성리학자#음식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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