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프로그램 구입 실무책임… 파문 커지자 압박 느낀듯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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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담당 국정원 직원 자살]유서내용 논란과 파장

유서내용 수차례 수정 19일 경기 용인동부경찰서 관계자가 전날 숨진 채 발견된 국가정보원 직원 임모 씨가 남긴 유서 3장 중 한 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운용 직원으로 알려진 임 씨는 유서에서 “내국인에 대한 선거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용인=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유서내용 수차례 수정 19일 경기 용인동부경찰서 관계자가 전날 숨진 채 발견된 국가정보원 직원 임모 씨가 남긴 유서 3장 중 한 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운용 직원으로 알려진 임 씨는 유서에서 “내국인에 대한 선거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용인=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국가정보원에서 해킹 프로그램 관련 업무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과장 임모 씨(45)는 최근 야권과 언론을 통해 해킹 의혹이 제기되면서 4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임 씨는 19일 공개된 유서에서 “내국인이나 선거 관련 사찰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자료를 삭제했다”고 밝혔다.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부분이다.

○ 유서 곳곳에 ‘신중한’ 표현

임 씨의 유서 내용을 보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정원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유서 첫머리에 ‘원장님, 차장님, 국장님께’라고 명시한 그는 “동료와 국민들께 큰 논란이 되게 해 죄송하다”며 현 사태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업무에 대한 열정’ ‘직원의 의무로 열심히 일했다’ 등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킹팀을 동원하면서까지 정보 수집에 나선 것이 불법 의혹을 일으킨 것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순수한’ 의도였음을 강조한 셈이다.

임 씨는 또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상급자에게 전하는 내용인 것을 감안하면 자신의 결백을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알리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임 씨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부 자료를 삭제한 것이 오히려 국정원을 난처하게 만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이 해킹 대상과 관련 정보를 공개하기로 한 마당에 해당 자료를 독단적으로 삭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정원이 ‘불법 사찰’ 의혹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임 씨에 대한 국정원 내부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해킹 자료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서버를 삭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의 주장은 진위를 의심받을 상황에 놓였다.

임 씨가 숨진 채 발견된 차량에서는 유서를 쓴 필기구는 없었다. 18일 오전 임 씨가 집에서 나오기 전 미리 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유서 곳곳에는 쉼표(,)나 마침표(.)가 진하게 표시됐고 삽입기호(∨)를 써서 표현이 수정된 흔적도 여럿 발견됐다. “대테러, 공작활동에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하였습니다”라고 적었던 내용에 ‘대테러’와 ‘공작’ 사이에 ‘대북’을 추가하고 ‘공작활동에’와 ‘지원했던’ 사이에 ‘오해를 일으킨’을 덧붙였다. 임 씨가 유서를 되풀이해 읽어보면서 민감한 표현이나 부족한 내용을 고친 것으로 보인다. 필적 감정 전문가인 양후열 법문서감정연구원장은 “유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씨체가 일관되고 마침표까지 확실히 표기해준 점, 지속적으로 단어를 고치며 의미를 확실하게 수정하려 한 점 등으로 볼 때 (임 씨가) 비교적 차분한 상태에서 의사를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서 공개를 반대하던 유족들은 국정원과 경찰, 다른 가족들의 설득 끝에 19일 오전 유서 일부를 공개했다. 가족에게 남긴 유서 2장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것으로 전해지나 유족들의 반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야산서 발견된 승용차 18일 낮 12시경 경기 용인시 한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된 국가정보원 직원 임모 씨의 마티즈 승용차 주변에 취재진과 경찰 관계자 등이 몰려 있다. 용인=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야산서 발견된 승용차 18일 낮 12시경 경기 용인시 한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된 국가정보원 직원 임모 씨의 마티즈 승용차 주변에 취재진과 경찰 관계자 등이 몰려 있다. 용인=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집 나온 뒤 바로 극단적 선택한 듯

임 씨가 경기 용인 자택을 나선 것은 18일 오전 5시경으로 알려졌다. 외출 전 부인에게는 “직장에 일찍 나가봐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 해킹 사태가 정치적 쟁점이 된 이후 임 씨는 가족들에게 “요즘 직장 업무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을 나간 임 씨가 연락이 두절되자 부인은 오전 10시 4분경 119에 신고해 소방관들이 임 씨를 찾아나섰다. 2시간 뒤 임 씨가 발견된 곳은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 화산CC 인근 화산1리 마을회관에서 500여 m를 산길로 들어간 고라지골이라는 곳이었다. 임 씨는 마티즈 차량 운전석에 앉은 채 숨져 있었고 조수석과 뒷좌석 위에서 다 탄 번개탄이 발견됐다. 유서는 조수석 번개탄 옆에 포개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경찰은 임 씨가 집을 나와 곧바로 야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일 오후 강원 원주시 문막읍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동부분원에서 진행된 임 씨의 부검은 30여 분 만에 끝났다. 정낙은 국과수 중앙법의학센터장은 “외상 등 타살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부검 결과 및 현장에서 발견된 가검물 등에 대한 검사 결과를 종합해 조속한 시일 내에 수사기관에 통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기도에서 일산화탄소 농도가 75%로 높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임 씨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됐던 용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유가족들은 고인의 죽음에 비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한 유가족은 “평소 책임감이 강했던 임 씨가 두 딸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며 “일개 과장이 무슨 권한이 있었겠느냐. 아이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위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 씨의 빈소는 경기 용인의 한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날 빈소에는 이병호 국정원장을 비롯해 국정원 직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권오혁 hyuk@donga.com / 원주=이인모 / 용인=박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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