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니 보이는 그 시절 아버지의 마음[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3일 23시 09분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해마다 5월이 되면 더욱 생각나는 분이 있다. 그리움보다는 죄송함이 밀려오는 분, 미처 해드리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분. 바로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평생 일을 하신 분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서는 교사로,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자영업자로, 중년 시절 이후에는 작은 제조회사에서 근무하셨다. 한평생 거의 쉬어 본 적이 없으셨다. 가족을 위해 늘 분주하고 고단한 삶을 사셨다. 아버지가 인생 후반에 접어드실 무렵, 나는 직장인으로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성과와 목표로 가득했고, 날짜가 가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퇴직은 그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나이가 들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특별히 살피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신 후부터 조금씩 변해가셨다. 어느 날 부모님 댁에 들렀을 때였다. 마침 어머니는 외출 중이셨고, 아버지 혼자 집에 계셨다.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나란히 앉아 TV를 보았다. 무슨 프로그램인지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없이 화면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요즘 어떻게 지내니?”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건네셨다. 나는 살짝 당황해 짤막하게 대답했다. “잘 지내요.” 그 한마디로 대화는 끝나버렸다.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말씀하시려다 멈칫하시는 느낌이었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하실까 봐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비슷한 장면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통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안부 전화를 드리면 아버지는 매번 “밥은 먹었니?”라고 물으셨다. 전처럼 곧바로 어머니를 바꿔주시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그럴 때마다 성의 없이 답변했다. 밥이야 으레 먹는 건데 왜 맨날 확인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사로운 것을 궁금해하시는 아버지가 몹시도 낯설고 불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내게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 같은 존재셨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시며 항상 지지해 주셨지만, 속정을 내보이시는 분은 아니셨다. 그래서 나는 사는 동안 아버지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버지와 마주하는 게 편치 않았다. 아버지가 퇴직하신 다음에도 아버지에 대한 나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후 세월이 흘러 나도 퇴직을 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됐다. 한번은 집에 혼자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나날이었다. 그때 문득 한 친구가 떠올랐다. 별다른 용건은 없었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친구라면 나를 잘 받아줄 것 같았다.

나름 고민하다 번호를 눌렀는데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긴 신호음만 계속됐다. 그 짧은 찰나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나를 피하는 건가,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지금은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을 들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원인 모를 민망함과 동시에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별것 아니었을 일이 그날따라 내 감정을 심하게 뒤흔들었다.

한참 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벨소리를 못 들었다며 밝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제서야 걱정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길지 않은 대화였는데도 마치고 나서 한동안 가슴속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친구와 나눈 잠깐의 통화는 무겁고 긴 나의 하루를 가벼이 만들어 주었다. 친구는 내 전화를 받아준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준 것이었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질문은 나와 관계를 잇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고, 말문을 여는 아버지만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 아버지의 그 말씀을 더는 들을 수 없다. 아버지는 몇 년 전 5월에 먼 길을 떠나셨다. 만약 그때의 그 거실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색한 침묵까지도 함께 견디며 아버지 곁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가정의 달이 왔다. 지금 이 시간, 평생 가족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다 일터에서 물러난 분이 있다면 한 발짝 다가가 보면 어떨까. 퇴직 후의 시간은 바쁘게 살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옛 지인에게 메시지를 썼다가 끝내 지워버리는 순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도서관에서 홀로 보내는 오후,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한 채 쓸쓸히 마치는 하루.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조용히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오랜만이라는 말 한마디, 잘 지내시는지를 묻는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 아버지가 내게 그러하셨듯, 그 짧은 인사는 보통의 안부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퇴직#가족#일상#관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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